[다산로] 찌라시와 선거
[다산로] 찌라시와 선거
  • 강진신문
  • 승인 2014.04.1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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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환 강진포럼 사무국장

한 무리의 사람들이 큰 비닐 풍선을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장면을 기억한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거기에는 삐라가 잔뜩 실어 있었다. 북한 땅으로 날아간 삐라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자못 궁금했다.

새삼스럽게도 오래된 유년의 풍경이 떠올라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삐라를 읽고 소지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삐라는 북한에서 남한으로만 보내는 것인 줄 알았다.

물론 그 이상의 기억은 없는 데, "아직도"라는 씁쓸함을 TV는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찌라시가 그 삐라의 혈통을 이어받았나보다. 기실 정치공학적 맥락에서는 찌라시와 삐라의 성질은 동일하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특정집단이나 개인을 비방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삐라의 경우는 앞서 보인 풍경이 실례이고, 찌라시는 아무래도 지난해 정치권의 말싸움에서 그 말의 정점을 찍지 않았나싶다. '찌라시 공화국'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이 갖는 음습한 느낌은 여전히 딴 세상의 그것이지 않을까싶다. 이 지점에서 영화 <찌라시:위험한소문>은 평가할만하다. 찌라시가 갖는 독성과 위험성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능 있는 여배우이었다.

오직 실력으로 삶의 돌파구를 찾고, 넓혀가고 있는 배우이었다. 이런 그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이 만든 덫에 걸려들어 삶이 끝장나고 만다.
 
그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결국 살해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는 그 가공할 덫은 바로 찌라시이었다. 물론 이 찌라시의 이면에는 어긋난 개인의 욕망이 버티고 있다.

자기의 욕망대로 타인을 소유하고, 이용하려고 하는 그것이 도사리고 있다. 타인은 생명을 가진 인격적 존재인 데, 사물을 부리듯 사람을 부리려고 한다. 급기야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여 그들의 약탈적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이러므로 "이딴 거 뿌린 놈 누구야?"라는 주인공 '우곤'의 말은 순진하다. 그를 포위하고 있는 사회의 운동방식이 비웃듯 억누르고 있는 데, 돈과 권력의 윤리를 성토하는 그의 노릇은 짠하게 느껴질 뿐이다. 어쩌면 늘 만나곤 하는 권력집단의 비행에 '쯧쯧'거리고 마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지방선거의 준비가 한창이다. 지역사회의 구석구석도 선거로 야단이다. 이제 곧 입후보자를 소개하고, 그의 정치적 비전을 안내하는 등등의 숱한 찌라시가 우리 집 앞마당에 놓일 터이다. 예상되는 그 찌라시의 무덤에서 이웃들의 구체적인 삶은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
 
주민의 목소리가 공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찌라시가 여론을 만들고, 뿌려지는 것은 아닐까? 유권자인 '나'는 후보자인 '그'의 정치적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가급적 유권자를 추상화된 단위로 산정하여, 밤새 자신의 지지표가 얼마나 확실한지를 계산하고 있지 않을까?

찌라시는 이 욕망의 첨병으로 오늘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론 선거운동원으로, 때론 유인물로, 지역신문사 인터넷 홈페이지의 허접한 글 등등으로 그 얼굴을 달리하여 우리의 일상을 침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호들갑이지만 오히려 선거가 기득세력들의 합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는 행위이지는 않을까?

이런 마당에 헌법이 보장하는 '나'의 기본권을 말한다는 것은 무색한 말들이지 않을까? 봄날에 꽃들은 피고 지는 데, 세상도 그처럼 피고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경쟁'은 이미 그 자체로써가 아니라 '이겨야 제 맛'이라는 논리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선거 또한 이런 약탈적 경쟁의 사회운영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할 터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스테판 에설의 제언이 쟁쟁하다.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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