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김영렬 화백<하편>고통과 당당히 맞서 그려낸 '인고의 화폭'
[4]김영렬 화백<하편>고통과 당당히 맞서 그려낸 '인고의 화폭'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3.08.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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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접주 조부.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종. 가족들의 잇딴 슬픔...관조의 세계 드러내

1923년생인 김영렬 화백은 유년시절을 비교적 부유하게 보냈다. 건설하청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일본에서 미술교육도 받았고 목포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때에는 발군의 미술실력과 손재주를 보이며 주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였다. 김화백이 15세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행방불명됐다.

아버지의 행방불명으로 김화백은 하늘아래 모친과 단 둘이 남게됐다. 김화백의 집안은 이미 동학혁명때 대란을 겪었었다. 해남에 살았던 김화백의 조부 김도일씨는 동학혁명 당시 장흥․강진․해남을 관할하는 접주(接主)였다. 혁명이 좌절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모든 재산이 몰수되고 가족은 뿔뿔히 흩어졌다. 김화백 부친의 나이 9세때였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이후 김화백과 모친은 강진읍의 한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삯바느질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손재주가 많았던 김화백은 어머니 일을 도와 바느질도 직접 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힘 들었다. 실종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도 너무 불쌍했다.

 

어둡고 캄캄했던 그 시절, 청년 김영렬은 우연히 프랑스화가 밀레의 전기를 읽게됐다. 세계적인 화가들이 그랬듯이 밀레또한 유년시절을 처참할 정도로 어렵게 지낸 사람이었다. 밀레는 인생파란을 겪은 후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통을 벗어버리고 싶지 않다’

 

김화백 자신은 지금까지 고통을 벗어버리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쳤는데, 고통을 벗어버리고 싶지 않다니... 김화백은 이 말 한마디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김화백은 그후 ‘고통스런 세상을 밀레 못지 않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김화백은 그후 어머니의 권유로 장흥의 한 친척집에서 4년 동안 미술공부를 했다. 광주사범학교 1회 졸업생이면서 장흥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친척이었다. 김화백은 당시 4년동안이 진짜 ‘미술(美術)’을 배웠던 시기였다고 소개했다.

 

4년 후 다시 돌아온 강진의 집은 여전했다. 어머니는 변함없이 삯바느질을 하고 있고 좁은 집과 가난한 살림살이도 여전했다. 4년동안 키워온 미술가의 꿈을 펼쳐보겠다고 말 할 수도 없었다. 다시 시작한 일이 어머니를 도와 삯바느질을 하는 일이였다. 여기에 재봉틀 수리와 축음기수리를 하러 다니는게 예전과 다를 뿐이었다.

 

김화백은 어머니가 불쌍하고 가슴이 답답하면 주먹밥을 싸서 마량까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면 그냥 앉아 쉬었다. 배가 고프면 호주머니속 주먹밥을 꺼내 먹었다. 마량을 향해 무작정 걷다가 아픈다리를 쉬기 위해 잠시 앉아 주먹밥을 먹으며 바라본 강진만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만덕산에서 꼬리를 물고 남쪽으로 이어지는 바위산이 날아갈 듯 움직이고 있었다. 아스라이 펼쳐진 갯뻘위로 끝없이 갈대밭이 이어졌다. 그속에 사람들이 웃고 울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게 강진풍경 그리기 였다. 미술도구를 들고 마량쪽으로 걷다가 미리점찍어 놓은 곳에서 화필을 손에 들면 모든 고통이 잊혀졌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강진 문화계의 거물이었던 차부진씨가 개인전을 한번 열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금서당에서 살던 김화백은 그림실력이 지역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초상화도 상당한 수준이였다. 차부진씨는 김화백을 다른사람들에게 ‘천재화가’로 소개했다.

 

지금의 경찰서 앞자리인 강진공회당에서 1953년 5월 11일부터 5일간 열린 첫 개인전은 말그대로 인산인해였다. 당시만 해도 유화는 희귀한 그림이여서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줄을 섰다. 30세의 천제화가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김화백은 첫 개인전 이후 삶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개인전을 마치고 몇일되지 않아 장흥초등학교에서 미술실기강사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김화백은 장흥초등학교에서 2년을 근무한 후 다시 장흥고등학교로 옮겨 2년간 근무했다.

 

김화백은 이후 61년부터 금릉여자중학교(현 성요셉여고)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0여년은 김화백이 작품활동을 가장 활발히 했던 때이고 생활도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 결혼도 하고 4남1녀의 아이들도 낳았다.

 

그러나 1969년 비극이 다시 찾아왔다. 당시 학교에서 시간강사를 대대적으로 감축하면서 여기에 김화백이 포함되자 김화백의 처가 목포의 친정집으로 가서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아이들 중에는 젓먹이도 있었다. 김화백의 모친이 슬픔에 못이겨 며느리가 죽은 지 4개월 후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학교측에서는 시간강사 해고이후 김화백의 집에서 잇따라 사람이 죽어나가자 복직을 시켜주었다. 김화백은 이듬해 복직해 시험을 치러 정교사 발령을 받았다. 시간강사 생활 15년 만의 일이였다. 이후 김화백은 88년 정년퇴직하기까지 성요셉여고에서 후학을 길러내며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정교사가 된 후에도 슬픔과 아픔은 계속됐다. 둘째 아들은 강진에서 장흥에 사람을 태워다주던중 교통사고로 비명에 갔다. 세째아들은 정신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넷째아들은 공수부대로 근무하던 중 첫 휴가를 나와 자살을 했다.

... ...

인터뷰는 숨이 멎는듯 중단됐다. 방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노화백은 창넘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 ...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미술평론가이면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교수인 김인환 교수는 김화백의 작품에 대해 “완향의 작품세계는 담백하고 소박하다. 정일한 관조와 다소 고전적인 격조, 그리고 차분하면서도 변화있는 율동과 청하한 기품이 감돈다”고 평가했다.

 

그의 한 평생을 점철했던 질곡과 진한 슬픔은 수려한 강진의 풍경을 통해 담백하고 소박하게 피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벗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밀레의 한마디에 평생을 푹 빠져 지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화백은 82년도에 만난 현재의 처 박영숙(65)씨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박씨는 큰아들과 외동딸을 결혼시켰고, 아들들의 잇딴 비운으로 이어지는 집안의 갖은 어려움을 겪어냈다. 김화백은 “저 사람은 정말로 고마운 사람”이라는 표현을 되풀이 했다. 박씨는 요즘 금서당에서 홀로 김화백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    

 

김화백은 “혹시 집사람이 아프면 똥구멍을 불어서라도 꼭 살려내라”고 사람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자신의 많은 불행이 본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인식을 깊게 하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김화백은 엄마의 죽음 후 세상을 떠난 자식들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다.

 

“강진의 풍경을 그릴때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산을 그릴 때는 조상을 뵙듯 했지. 물을 그릴 때는 어머니의 품을 생각했어. 조상같고 어머니 품같은 강진의 풍경 하나하나가 어찌 성스럽지 않았겠는가” 노화백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원고를 준비하면서 김화백을 몇 차례 더 만날 수 있었다. 사지의 뼈는 하루가 다르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지방과 근육이 급격히 분해되고 있다는 표시였다. 사람이 늙고 병이들면 몸과 함께 마음도 함께 사그라든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데 몸은 병들고 고통을 느껴야 하는 이 커다란 모순을 누군들 피해갈 수 있을까. 이 순진무구한 화가의 몸에도 병이 찾아와 고통이 끓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은 저렇게 여리고 푸르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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