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마을은 지난 1600년대 후반 김해김씨 사군파 김명순(1677~?)씨가 입총해 당시 바닷물이 인접해 있었던 갯터에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룩했다는 이유로 갯몰이라는 지명과 함께 신기라고 불리게 됐다. 현재 마을에는 31가구에 6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1600년대 마을형성, 굴, 꼬막 맛좋기로 유명
주민들, 반농반어로 생계 이어


강진만을 따라 도암면으로 향하던 지난 14일. 하늘은 하염없이 겨울비를 쏟아내고 있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가 세상 다 적시고 대지 그 아래까지 스며들 기세다. 겨우내 추위와 싸우며 견디어낸 초목들이 기지개를 켜고 새싹을 틔우는데 더 없이 좋은 날이다.
 
길을 달리는 내내 끝없이 펼쳐진 강진만은 물기 빠진 갯벌위로 누런 갈대들이 비바람에 흔들거린다. 강진만 갈대밭은 밀물 때가 되면 갈대의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른다. 썰물 때가 되면 갈대의 뿌리가 보일 정도로 물이 빠져 나간다.

그러나 물이 빠져나가면 보이는 것은 갈대의 뿌리만은 아니다. 갈대의 허리에 남아있는 바닷물의 흔적이 애처로움을 더 한다. 그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갯물이 삶의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그 허무함은 기자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도암면 망호마을을 지나 강진만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우측으로 신기마을이 나타난다.
 
신기마을은 도암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강진만의 입구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은 가옥 뒤로 늘어져 있는 대나무 숲을 따라 형성돼 그 모습이 마치 부메랑 모양처럼 긴 형태를 띄고 있다.

과거 마을주민들은 이곳 대나무 숲을 일궈 초가집의 지붕을 엮는 재료로 사용하거나 섬 지역 사람들에게 내다 팔았다.

하지만 가옥의 형태가 한옥이나 양옥으로 바뀌면서 대나무의 사용량은 크게 줄면서 오늘날 울창한 대나무 숲을 형성하게 됐다. 마을 앞들에는 조그맣게 솟아오른 산봉우리가 보인다.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봉두(鳳頭)라고 불린단다.
 
신기마을은 1600년대 후반에 김해김씨 사군파 김명순(1677~?)씨가 입촌해 당시 바닷물이 인접해 있었던 갯터에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룩했다는 이유로 새터, 갯몰이라는 지명과 함께 신기라고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김씨는 이 일대에서 최초로 생활한 인물이다.(강진군마을사-도암면편 p.372)현재 마을에는 김해김씨 이외에도 밀양박씨, 전주이씨, 탐진최씨 등 총 31가구 6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신기마을 앞 일대는 본래 광활한 바다였다. 그냥 바다가 아니다. 멀리 구강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유유히 바다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깊은 수심으로 무진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면서 배들의 항해도 잦았다.
 
강진군마을사 도암면편 기록에는 '제주도에서 마두(馬頭)함씨라는 사람이 육지로 오기 위해 옷가래(속옷아래)를 걷어 올리고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옷가래가 조금도 젖지 않다가 추자도 앞바다에 이르니 옷이 조금 젖었다.

그런데 신기마을 앞바다에서 대구면 돗머리 나루터를 거쳐 마량으로 나아가려 하니 옷가래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몽땅 젖어버렸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황당한 전설이지만 아마도 추자도 앞바다보다 강진만의 수심이 깊다는 것을 역설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을 앞은 일제시대 이후 대대적인 간척사업의 결과로 광활한 농토로 탈바꿈했고 주민들은 이곳을 관파농장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제방을 막아서 조성한 농토를 영동농장이라 불렀다. 이 두 농장은 1995년 경지정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널찍한 농토는 마을주민들의 생활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수산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어촌의 형태를 띠었으나 간척사업이 진행되고 농토가 조성되면서 주민들은 어업뿐만이 아니라 벼농사까지 겸업하게 되었다.
 
김재우(74) 마을개발위원장은 "주민들은 양식장을 통해 꼬막, 굴, 바지락 등의 수산물을 수확해 강진시장에 내다 파는 일 이외에도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며 "농촌일과 어촌일을 겸업하다보니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신기마을을 걷다보면 유난히 산등성이 붉은빛 황토밭이 눈에 띈다. 양질의 황토에서는 각종 밭작물이 자라나 주민들의 소득으로 이어지게 만들어 준다. 마을주민들은 지난 4년 전부터 이곳에 옥수수를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기장, 콩, 깨 등도 마을주민들의 귀한 소득 작물이다.
 
   
 
이영채(58)신기마을이장은 "이곳 일대에서 수확하는 옥수수는 맛이 좋기로 소문나면서 전국 각지로 그 판로를 이어가고 있다"며 "수확시기에는 중간상인들이 마을회관에 며칠씩 묵어가며 물건을 공수해갈 정도로 인기가 좋다"고 설명했다.
 
과거 신기마을은 다양한 농·수산물을 사드리는 일명 중간상인들의 발길이 유독 많았다.

특히 신기마을 일대에서 채취한 굴과 꼬막은 맛이 좋기로 정평나면서 겨울 이 맘 때면 차량의 행렬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거래가 왕성했다.

주민들은 하루 평균 4~5만원 정도의 수입이 거뜬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 모습이 예년만은 못하다는 것이 이내 씁쓸함을 더한다.
 
신기마을도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주민의 대부분이 70대 노인들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오늘도 바다로 또는 농토로 향한다. 한 평생 바다와 농토를 벗 삼아온 그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세월 속의 한 구석에는 그렇게 늘 바다와 농토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인터뷰 - 신기마을 김운례 할머니
"한 평생을 함께 해온 갯벌이 이제는 떠나려나 봅니다"
광활한 갯벌은 신기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참꼬막, 바지락, 굴, 낙지 등 사계절 내내 끊임없이 어패류를 내주는 갯벌로 주민들의 삶은 더없이 풍족했다.

주민 김운례(84)할머니는 60여년의 세월을 갯벌과 함께 했다. 김 할머니는 80세가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갯벌로 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김 할머니에게 있어 갯벌은 가장 행복한 무대이자 자신의 추억을 머금은 공간이나 다름없다.

"세월은 많은 것들을 변하게 했죠. 나의 모습과 자녀들의 모습, 그리고 이웃사람들의 얼굴까지도 전부 변했답니다. 마을의 모습도 변했고 풍경도 달라졌죠.

그러나 바다는 항상 그대로 였어요" 김 할머니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갯벌이 너무 많이 변했어요. 아예 전부 썩어버렸죠. 깊이는 또 왜 그렇게 깊어졌는지. 발을 내딛기가 겁납니다. 가진 전부를 한 없이 내어줄 것만 같았던 갯벌이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려나..."

김 할머니는 흐느끼는 목소리를 끝으로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