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호수가 빚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마을
산과 호수가 빚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마을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1.09.02 1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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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 대구면 항동마을

예부터 마을주민들은 수확한 고추를 건조기에 말리지 않았다. 무조건 햇볕을 이용해 건조한 고추만을 소비자들에게 판매했다. 이러한 주민들의 노력에 오늘날 항동마을 태양초를 찾는 소비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광활한 저수지가 마을 앞을 수놓고...
천태산이 그 뒤를 감싸네

지난 1979년 대구면 항동마을과 용문마을을 잇는 저수지가 개설됐다. 저수지는 항동과 용문마을 등 인근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시설로 자리 잡게 됐다.

용문마을 주민들은 수위가 조절되었다며 환호성을 질렀고 수로를 개설하고 경지정리를 해가면서 넓은 면적의 농경지를 확보해 갔다.  
 
그러나 항동마을 주민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저수지축조로 마을 전체가 잠기거나 일부를 내줘야했던 주민들이었다. 당연히 기분은 좋을 리 없었다.

일부 주민들은 땅을 내주고 받은 보상금으로 마을을 떠났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항동마을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마을이 작아지기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은 점차 그 수가 늘어 전체인구의 절반이상 됐다. 그렇게 항동마을은 조용히 사라지는 듯 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지금, 항동마을은 어떤 모습을 갖고 있을까.
 
지난 30일 찾아간 대구면 항동마을은 비교적 조용했다. 초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저수지는 한없이 잔잔했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천태산은 고요했다. 저수지를 따라 인근 정수사로 이어지는 도로만이 차량들의 행렬로 분주할 뿐, 주민들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항동마을을 찾은 첫 느낌은 이렇듯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마을 인근 축사에서 울려 퍼지는 소들의 울음소리만이 그 고요함을 간간히 깨트릴 뿐이었다.
 
마을 앞으로 개설된 도로변은 막 수확한 깨와 고추들이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그 속에서 깨를 털고 있던 주민 이용금(여·65)씨를 만날 수 있었다.
 
마을에 대한 질문에 이씨는 비교적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짧았다.
 
이씨는 "항동마을은 자랑할 것이 없어, 그냥 조용한 마을이지"라고 답할 뿐이었다. 답답했다. 조용한 마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답답했고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에 그 답답함이 배가 됐다. 다시금 질문을 던지자 그제서야 이씨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예부터 항동은 고추로 유명했지. 지금도 유명하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더했어. 아마도 내가 20살을 넘겼을 때였지, 당시에 이맘때면 우리 마을로 고추를 사러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지"라며 "마량에서 온 사람도 많았고 완도 고금도와 신지에서 배를 타고 왔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항동마을을 다시 둘러보았다. 사방이 산이었다. 강진군마을유래지에서 항동마을을 살펴보면 '한골'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한골은 항동마을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이어 책은 '마을이 산골로 이루어져 있어 취락 구조가 골짜기를 따라 골목길이 형성되듯 가옥이 분포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마을은 예부터 천태산 자락으로 겹겹이 쌓인 곳에 자리했다. 산이 많은 곳은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저물기 마련이다. 그만큼 일조량은 부족하다.

밭작물의 재배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일조량이다. 더욱이 그 당시는 오늘날처럼 고추종묘를 심어 고추를 재배하지 않았다. 씨를 뿌리고 싹을 키워 고추를 재배했을 때였다.
 
그에 대한 해답은 오늘날 주민들의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현재 항동마을은 20여호 40여명의 주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 90%이상이 고추재배에 나서고 있다.
 
열악한 재배환경속에서 고추재배를 계속 해올 수 있었던 데는 주민들의 지혜와 기술력이 뒷받침됐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기술력에 대해서는 몸으로 터득한 것이라는 말만 덧붙여졌다. 결국 주민들이 터득한 재배기술은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었던 셈이었다.
 
여기에 오늘날 항동마을 고추가 인기를 끌고 있는 데는 주민들의 정성과 노력이 덧붙여졌다. 주민들은 수확한 고추를 건조기에 말려 팔지 않았다. 무조건 햇볕을 이용해 건조한 고추만을 내다 팔았다. 바로 항동마을의 태양초이다. 하우스재배를 하지 않는 마을에 비닐하우스시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늘날 항동마을 주민들은 마을발전에 힘을 쏟고 있다. 대부분이 70대 이상의 고령자로 힘이 부치는 게 사실이지만 일부 젊은 세대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그나마 큰 위안이다.

이를 계기로 마을에는 없던 축사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고 현재는 4~5축산농가에서 2백여두 이상의 한우를 사육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 또한  마을이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하나로 피폐해져 가는 농촌마을에 작은 희망이 찾아들기만을 바라고 있다.
 
마을출신 인물로는 강진경찰서에서 경찰공무원을 지낸 김재섭씨를 비롯해 경찰공무원으로 활동 중인 김문호씨, 노행기씨, 이기성씨 등이 있다. 또 광주 과학고등학교와 나주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정순국씨와 정순석씨도 항동마을 출신이다.



마을에서 만난사람 - 이선식 씨

"인정 넘치고 상부상조하는 마을" 

마을입구에서 주민 이선식(78)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이씨는 200평 남짓한 텃밭에서 수확한 깨를 터느라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씨는 "올해는 참깨 작황이 좋지 않아 수확량이 지난해에 비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며 "자녀들에게 많은 양의 참기름을 보내주고 싶었던 터라 그 아쉬움도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최근 마을주민들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잦은 멧돼지 출몰이다"며 "주민들이 한 해 동안 정성들여 가꿔 놓은 밭작물을 멧돼지들이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어 해결책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마을에 대해 이씨는 "인근 용문과 계치마을을 비롯해 이 일대에서도 가마터가 발견됨에 따라 고려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바람에 대해 이씨는 "자식들이 각자 맡은 일 모두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며 "인정 넘치고 상부상조하는 마을로 항동마을이 널리 이름을 떨치는 것도 하나의 큰 바람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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