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도공의 넋을 기린다
천년 도공의 넋을 기린다
  • 김영미 기자
  • 승인 2011.08.01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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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 '고려시대 무명도공제' 매년 청자축제 성공 기원도

대구면 천태산 자락에 위치한 정수사에서는 강진청자축제 전날 무명 도공들의 정신을 기리며 넋을 위로하고 성공적인 축제를 기원하는 무명도공제가 봉행되고 있다.

무명도공제는 50년이 넘게 정수사에서 봉행되어 왔지만 강진청자축제를 개최하면서부터 군민과 청자축제팀과 같이 청자축제 성공 기원제 및 무명도공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다.

 
애장왕 원년(800년)에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정수사는 고려시대 청자문화의 전성기에 청자를 굽던 도공들에게 신지식을 500년간이나 전하던 곳이기도 하다.

또 도공들이 자주 찾아와 부처의 자비로움 속에서 정신적 수양을 갈고 닦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신비의 고려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리던 정신적 귀의처였다.
 
또한 정수사는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 수하 염걸장군이 왜병이 쳐들어 왔을 때 두아우 서와 경, 그리고 외아들 홍립과 함께 이곳 정수사 골짜기로 유입하여 섬멸한 전승지이자 나라를 위해 싸웠던 승군들을 수용했던 충절의 혼이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도공제가 봉행되는 정수사는 고려시대 무명 도공들이 작품을 구상하거나 가마에 불을 지펴 구워 내려 할 때 기도하던 그들의 전용 도량으로 이용되었다.

이에 정수사에서 그 당시 질흙을 빚어 청자와 그릇을 빚던 고려 무명 도공들을 위해 경내 도조사(陶祖祠 도자기의 조상을 모신곳)에 도공신위를 모시고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매년 도공들의 위패 앞에는 촛불을 밝혀 분향하고 강진청자축제 성공도 함께 기원해온다. 도조사에는 지난 97년 무명 도공들의 높이 80㎝ 넓이 35㎝의 위패가 모셔졌다.

또 지난 2006년에는 도조사 앞에 연꽃모양 좌대위에 맥반석옹기 자기기둥이 놓이고 청자로 제작된 석등이 올려진 높이 2m의 혼불등이 세워졌다.

혼불등은 1년내내 도공들의 청자에 대한 열정을 밝힌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올해 제39회 강진청자축제를 맞이하여 고려시대 무명 도공제가 봉행되는 도조사 외벽에는 그 당시 도공들이 도자기를 빚었던 과정들을 새로이 그려 넣는 단청작업이 진행됐다.

건물 외벽에는 도공들이 정수사를 찾아 기도하는 모습, 질흙 메치기, 물레를 돌리는 장면, 가마에 굽기, 성형하고 유약을 바르는 작업, 완성작품 검토 과정들이 그 시대를 연상케 만든다.  
 
고려청자의 운명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고려시대 말까지 화려하게 꽃피웠던 청자는 조선시대 이씨 정권의 출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고려 권력 심층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번성했던 고려청자는 고려말 이씨 정권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어두운 역사의 늪으로 들어가야 했다.
 

청자의 종말은 청자의 멈춤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쉴 새 없이 청자를 구워내던 도공들은 어디로 갔을까.

태토를 만들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지, 연료를 공급하던 주민들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했으며, 청자를 멀리 개성까지 실어 나르던 사공들은 또 어떤 삶을 살아갔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형성됐을 적지 않은 경제력이 붕괴됨으로써 강진지역을 비롯한 인근 남해안 지역들이 겪었을 고통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한 비통한 역사의 한 중심에 정수사가 있다. 정수사는 신라말 애장왕 서기800년 도선국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전해온다. 정수사는 창건 이후 번성을 거듭했다.

조선후기인 1562년에는 내암이 26동, 외암이 25동이 되었고, 기거하던 스님들만 10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정수사 주변 계곡에는 지금도 당시의 암자 터가 여기저기 남아 있어 이를 반증해준다.

정수사의 번창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숭불정책과 함께 도공들의 튼튼한 물적 기반으로 작용되었다.
 
정수사에서는 가마에 불을 땔 때면 기도를 올렸을 것이고, 청자를 싣고 뱃길을 떠나는 사공들도 정수사에서 제를 지냈을 것이다. 지금 정수사에 세워져 있는 도조사는 그 같은 역사적 근황을 근거로 건립된 것이다.

청자와 정수사는 그렇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역사의 한축을 형성해 왔고 무명 도공제가 매년 봉행 되어지고 있다.
 
정수사 수현 주지스님은 "고려시대 무명 도공들의 정신적 귀의처 역할을 했던 정수사가 좀 더 세상에 알려지고 의미를 찾았으면 한다"며"고려시대 무명도공이 아니면 오늘의 청자가 있을 수 없어 앞으로도 무명 도공제를 지내 혼을 달래고 역사를 기리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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