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옥들 너머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들이 농촌의 풍광을 더하고 있다. 벽송은 뒷등에 푸른 소나무가 울창해 붙여진 이름이다.

탐진강변 위치, 청동기시대부터 사람 살았던 곳

변덕스럽고 서늘한 봄날에도 꽃들은 피고 있다. 너무 작아 눈에 띌 듯 말듯 한 꽃봉오리들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하다.

콘크리트 바닥의 갈라진 틈새에 가냘픈 잎사귀를 내밀고 있는 작은 야생초들도 어느새 고개를 내밀기에 바쁘다. 해마다 봄이면 잊지 않고 피어나는 꽃들이 안겨다주는 즐거움에 그토록 봄을 기다렸나보다. 
 
차창 넘어 들어오는 봄바람을 벗 삼아 잠시 발길이 머문 곳은 군동면 풍동리. 남미륵사에 자리한 대형 청동불상의 온화한 얼굴이 바라다 보이는 풍동3리는 풍동, 봉산, 벽송의 3개 마을로 이뤄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다시 벽송(碧松)마을로 향했다. 가옥들 너머로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마을의 뒷등에 푸른 소나무가 울창해 불러진 마을답게 가히 벽송이었다.   
 
벽송마을은 조선시대 청주김씨와 탐진최씨가 마을에 처음 입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는 설도 함께 전해진다.

이는 인근 풍동마을과 명암마을에 자리한 고인돌을 비롯해 주변에 위치한 산과 강이 있어 일찍이 사람이 머무르기 좋았기 때문이다.
 
마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마을회관 부근에서 김행천이장을 만났다. 미리 연락을 취했기 때문에 김 이장은 바쁜 일을 잠시 미뤄두고 기자를 반겨주었다.

김 이장에 따르면 현재 벽송마을은 20여가구 3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풍동3리 중에서는 인구수가 가장 적은 마을이라는 꼬리가 뒤를 이었다.

   
▲ 마을주민들이 마을회관에서 윷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래도 마을이야기에 김 이장의 입가는 웃음이 한 가득이다.

모처럼 마을을 찾아준 기자에 대한 반가움도 있지만 마을에 대한 옛 추억을 회상할 시간을 갖게 된 것에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김 이장에 따르면 풍동3리는 화합의 터전이다.

마을 안길이 마을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지만 이곳 주민들에게 그러한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마을 안길일 뿐, 경계의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다.

마을의 형국 또한 특별나다. 대부분 각 마을마다 마을의 형국이 전해오지만 풍동3리는 세 마을의 모습이 더해져 마을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풍동3리는 하늘을 나는 기러기 형국이라고 전해진다.

인근 봉산마을은 기러기의 왼쪽 날개에 해당하고 풍동은 오른쪽 날개, 벽송은 몸통 부위에 해당했다. 몸통에 해당한 벽송은 예부터 부자가 많았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에 김 이장은 "벽송마을은 부촌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며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당시 인근주민들이 벽송은 부자들만 모여 사는 동네라는 얘기를 자주 했던 기억이 난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이장은 현재 벽송마을이 풍동3리를 비롯해 군동면 내에서도 가장 침체된 마을 중 한 곳으로 전락한 현실에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지난 1990년대까지 벽송마을의 농경지는 36㏊에 달했다. 이중 논 면적은 16㏊정도였다. 오늘날 6㏊면적과 비교하면 수많은 농토가 사라진 셈이다.

   
▲ 주민들의 사랑방 벽송마을 회관 전경이다.
사라진 것보다는 마을주민들의 소유권이 없다졌다는 표현이 옳다.

그만큼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줄었다는 얘기다.

현재 마을에는 김 이장을 비롯해 2~3농가만이 농사를 짓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풍동3리는 각 마을을 나누지 않고 화합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벽송마을 주민들의 화합은 단연 으뜸이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벽송마을은 정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지난 12일 마을주민들은 장흥으로 봄나들이를 가졌다. 3년 전부터 마을주민들이 3개월마다 한 두차례씩 즐기고 있는 행사이다.
 
지난 2007년도까지 마을주민들은 완도, 해남 등지로 관광여행을 즐겼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은 늘 힘겨움을 안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몸이 편치 않으니 마음이 편 할리는 만무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주민들만 여행을 즐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먹거리 여행이다. 장소는 대부분 인근 장흥이나 강진읍이었다. 그래도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의 화합은 갈수록 높아졌다.
 
벽송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대소사에 있어서 내일처럼 나서 해결해 왔다. 6년 전 마을회관을 세울 당시 건립자금이 부족해 마을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두고 출향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수천만원의 기금으로 현재의 마을회관을 지었다.
 
예부터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주민들은 그 정신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마을을 이끌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  I  벽송마을 김원중 노인회장‥‥"사람은 줄었지만 동네인심은 그대로"

   
 
마을회관을 나오던 중 김원중(86) 노인회장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회장은 지난 2009년까지 군동면 노인회장을 역임했다.
 
마을에 대해 김 회장은 많은 것이 변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마을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만큼 아쉬움 또한 컸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후한 인심이나 근면한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며 "사람들이 떠나고 버젓이 남은 집에서 옛 인심이 느껴지는 것이 농촌의 모습이다.

벽송마을 또한 빈 가옥이 하나 둘 늘어가지만 옛사람의 인심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김 회장은 일본 방사능 확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김 회장의 막내 아들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김 회장은 "막내 아들이 있는 후쿠오카 지역에는 지진과 해일의 위험은 없었지만 방사능이 확산되고 있어 하루빨리 일본 원자로 사태가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다"고 밝혔다.


▶벽송마을에 가면

   
 
마을회관 앞으로 1m 정도의 넓이의 두개의 돌이 나란히 놓여있는 연자방아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밑둥을 차지하고 있는 돌은 지름 1.3m에 달했고 그 위에 놓인 돌은 지름1m에 가까웠다.

두 개의 돌 높이는 30㎝ 정도를 나타냈다. 돌의 가장자리는 주민들의 수많은 작업으로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벽송마을 연자방아는 도정시설이 없던 시절 길다란 막대를 달고 소를 이용해 쌀과 보리를 찧던 도구였다.

오늘날 그 기능을 상실한 채 회관 한 켠을 장식하고 있지만 마을주민들에게는 추억의 보물로 간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