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영랑생가의 명문
[3]영랑생가의 명문
  • 강진신문
  • 승인 2003.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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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의 사상 고스란히 깃들여 있는 숨은 문화재

탑골 꼭대기집 이라 불렀고 영랑생가의 안채는 보은산 선인봉 자락의 동서로 펼쳐진 건물지의 서북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위 환경은 남쪽의 남 밖, 동쪽의 동 밖, 북쪽의 성너머 평동의 도화거리, 세무서앞의 객사패와 함께하고 옛 토조, 현 읍교회, 우체국, 도서관, 거목장, 수도탕 등지 일대는 연지변 마을이었는데 연못중앙에는 바위가 있었고 3.1운동때는 최덕주 등이 만세를 불렀다한다.

 

영랑을 「서정시인」이라 한 것은 1936년 11월에 발표한 시인부락이라는 책의 광고문안에 「영랑이전에도 조선에 서정시인이 있었는가?」에서 비롯된 듯하니 금년 67년째이다.

 

그동안 그에 관한 연구 논문 등은 많이 발표되어서 시가 몇 편, 산문이 몇 편, 대표작은 무엇인지는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생활하던 집에 대해서는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어서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보고 들어본 바를 글로 엮어 찾아오는 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안채와 사랑채 순으로 엮어보았다.

 

■안채

안채는 서남쪽에 우문, 그 서쪽에 장독대,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서는 남북으로 낮게 쌓은 증담이 있고 담장의 북쪽쯤에 안채와 사랑채를 오고가던 중문이 있었으며 그의 동쪽은 사랑채가 있으며, 사랑채의 동쪽은 영랑개인전용 정구장이고 그 주변에 약간의 모란들이 있었다한다.

 

다음으로 뒤 안의 연덕배기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동백나무 다섯 그루가 서있는데 그 지름은 82, 104, 128, 140, 112cm등이며, 북쪽 전체는 대나무가 둘러서있고 그 밑에는 자생차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서쪽 모퉁이는 은행과 살구나무가 있는데, 건물너머의 북서쪽에는 고목나무와 감나무 등이 있고 그쪽의 대밭에는 작은 불상이 있었는데 1930년경에 김명서가 일꾼들을 시켜서 자기집으로 옮겨 도자기잔에다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었다한다.

 

상량문

상량문은 「대한광무10년(1906년)병오 3월10일 기둥을 세우고 15일날 상량식을 가졌다」고 씌어있으니 2003년 현재 건립 97년째가 되며 영랑이 태어난 4살때에 해당이 된다.

 

■사랑채

사랑채는 서북의 중문고, 남쪽 문가채 쪽의 중문이 있었으며 마당의 나무는 석류(110), 백일홍(81.5), 유자(130), 돈나무(132), 은행나무(235.5)등이 있다. 은행나무가 있는 쪽 담장은 옛 그대로이며 남쪽 담장 너머쪽은 텃밭이었고 근처에 바가지 샘이 있어서 빨래를 하거나 허드렛물로 사용하였다한다.

 

영랑은 항상 행랑채에서 지냈고 식사때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안채에 갔다하며 건물의 방위는 계좌, 정향 즉 북동좌, 남서향이라 적혀 있으며 명문은 상량문과 주련으로 나뉘어졌다.

 

■상량문

상량문은 방위를 동향과 사향으로 나뉘어 적었고 동향은 「세재갑자9월 임자오시수주, 동월9월 진시상량, 즉 갑자변(1924)9월 임자12시에 기둥을 세우고 같은 달 9일 8시에 상량하다」이다. 이 구절 끝의 복원문은 「오가유일객, 정시해증인, 구함 ○○○, 능감○○○) 즉, 우리집안에 한 나그네가 있으니 바로 바다 가운데 사람이요, 입(口)에는 ○○○을 머금었으니 ○○○을 잘 덜어 주리라」이다.

 

서향은 가효미주 로소동락, 영웅호걸, 서남쟁취, 연성남궁명전○○(佳肴美酒老少同樂,英雄豪傑西南爭趣宴成南宮名傳○○)즉 좋은 안주와 맛있는 술로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즐기고, 영웅과 호걸은 서쪽과 남쪽에서 다투어 오매, 남방에 건물에서 잔치를 이루니 이름은 ○○에 전하리」라는 것이다.

 

■주련

 

주련이란 기둥에 써 붙인 글귀인데 모두 5개가 있으며 그 크기는 가로15cm세로94.2cm이다. 그 내용을 동쪽에서 서쪽 순대로 적으면「수심어자락, 집임채약, 결거관화, 직신심기원, 비탐안계관, 임무조지귀‘’이다. 

 

설명하자면 첫째는 풀이 깊으면 고기가 헤엄치기 좋고, 출처는 두보(712-770)가 지은 견흥(흥을돋구어 울적함을 푼다)의 시이고, 둘째는「옷소매 걷어 올리고 약초를 캐고 개울물 막아 꽃에 물을 준다」인데 출처는 알지 못하며, 셋째는 「강직한 신하는 마음으로 먼 날을 기약한다」인데 이 구절을 심기가 요체이며 뜻은 「마음속으로 기대한다」이고 출처는 남사의 17편 향류전의 아여사 심기구의 이다.

 

넷째는 「탐욕을 버리면 안개가 걷힌다」인데 이구절은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범위 즉 식견에 비유한 안계가 요체이며 출처는 왕유(701-761)의 시에 안계금무염심공안가미이다. 다섯째는 「숲이 짙으면 새가 날아든다」인데 출처는 두보의 시 임무조유귀의 유를 지로 바꾸어 적은 것 같다.

 

■맺은말

거문고와 북등 음악과 체육도 좋아하던 영랑은 1930년 5월에 창간된 「시문학지」에 13편의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1950년 6월에 신천지라는 책에 5월의 한을 마지막으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 중에 자기의 감정을 나타내는 일인 서정시인이라 상징하며, 1934년 4월 문학지 3호에 발표한 「모란이피기까지」를 대표작으로 정하여 사직공원(70년) 군립도서관(75년)생가(88년)등에 시비로 세웠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독립운동과 그의 정신이 무엇이었는가는 고찰을 시도해본 적이 없다. 여기서 생가명문을 다룬 필자의 의도는 기상 때문에 실패한 농경민의 슬픈 과거를 희망하는 모란이피기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주의 아들이면서도 독립운동을 하였고 민주주의를 신봉하였으며 남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위 상량문의 해증인과 주련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한층 큰마음을 되찾고 그냥 보아 넘긴 주련은 첫째와 다섯째, 셋째와 넷째가 댓귀이니 고쳐 걸었으면 한다. 다시말해 ‘수심어자락, 임무조지귀’, ‘집임채약 결거관화’, ‘직신심기원, 비탐안계관’으로 바뀌어야 원문 존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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