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서쪽 능선이 용머리 형국이라고 하여 이름 붙여진 용두마을은 금강천을 따라 가옥들이 위치하면서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됐다. 현재 마을에는 21호 30여명의 주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두부공장, 모시공장, 방앗간 등 다양한 상업 성행
높은 교육열... 서당도 많아

   
용두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서당을 알리는 이정표이다. 특히 마을에는 서당집, 서당잔등, 서당골목 등 서당과 관련된 지명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용두마을에는 두 개의 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00년도까지 마을회관으로 이용됐던 강수제와 마을 뒤편 산 중턱에 위치한 용강제라는 서당이 그것.

용두마을에 위치한 두 개의 서당은 인근 도룡, 삭둔, 백양마을에 위치한 주민들에게도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도룡리 4개 마을의 교육을 전부 도맡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용강제와 강수제는 오늘날까지도 보존된 채 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의 소중한 자산 중에 하나로 남아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지난 1910년대 용두마을은 병영면 내에서도 가장 잘 사는 마을 중 하나였다.
 
박일성(72)이장은 "당시에는 마을 경작지가 군동면 화방리 달영마을까지 이를 정도였다"며 "일꾼 10~15명을 거느리고 다니는 주민들도 많았고 마을을 오가는 장사꾼들도 즐비했다"고 말했다.
 
병영면은 조선시대 전라병영성이 위치하면서 병영상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던 고장이다. 그만큼 인적, 물적 교류가 즐비하게 이루어졌던 곳이 병영면이었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70~80여 년 전 까지 용두마을에는 상업을 주로 하는 보따리 장사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마을에는 두부공장을 비롯해 모시공장, 방앗간 등 다양한 상업이 성행했고 주민들은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만큼 마을의 공동재산도 많이 모아졌고 대부분이 마을 동답 등을 구입하는데 사용되면서 마을의 경작지가 넓어졌던 셈이었다.

   
▲ 박일성이장(맨 우측)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이 회관에 모여 앉아 막걸리와 과일, 과자 등을 나눠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잘 사는 마을이었던 만큼 주민들의 인심 또한 좋았다. 특히 용두마을은 음식솜씨 좋은 마을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장사꾼을 비롯해 인부, 관공서 직원들이 점심을 즐기기 위해 마을을 자주 찾아들 정도였다.  
 
여기에서 음식솜씨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에 대해 주민 이송자(70)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씨는 "식당이 그리 많지 않았던 1990년대에 공사인부들이나 인근 사람들이 마을로 찾아와 밥을 즐겨 먹었다"며 "면사무소 직원 등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까지 마을에서 밥을 먹으려고 자주 마을을 찾아들곤 했다"고 밝혔다.
 
당시에 용두마을이 음식 솜씨가 좋은 마을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마을주민들 조차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마을을 찾아드는 이들에게 정성을 담아 한 상 가득 음식을 내오는 주민들의 모습들이 음식 맛까지 좋아 보이게끔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볼 뿐이다.
 
오늘날 용두마을의 모습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주민들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과거 병영면에서 제일 잘사는 마을을 자랑하는 모습은 오늘날 병영면에서 가장 못사는 마을로 변모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군동면까지 이어졌던 동답과 논경지도 대부분 사라져 오늘날 논 면적은 고작 7㏊정도였다. 농사를 짓는 농가도 4가구로 줄었다.
 
더욱이 대부분의 마을주민들이 고령화 되면서 마을 발전과 소득 마련을 위한 어떠한 노력조차 할 수 없게 된 현실에 주민들의 아픔과 고통은 더욱 크기만 했다.
 
이에 대해 박이장은 "오늘날 용두마을은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현실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며  "10년 뒤에는 용두마을이라는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며  아쉬운 심정을 나타냈다. 
 
마을 출신 인물로는 장흥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최광진씨, 병영동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김상면씨, 병영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최인근씨, 의정부 시청에 근무하고 있는 나용환씨, 제일은행 서울지점장을 맡고 있는 조광조씨, 신안에서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근주씨 등이 있다.

 


 

   
 인터뷰┃마을 개발위원장을 맡고있는 최인근 씨

병영초등학교에서 38년 동안 교편을 잡았던 최인근(89)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마을개발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씨는 마을의 최고령자로 마을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들려줬다.

특히 최씨의 조부인 최유선 옹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백목을 장흥과 강진 장에 내다 팔면서 부를 축적했던 소문난 장사꾼 중 한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최씨는 "당시 할아버지께서 백목을 지게에 짊어지고 장흥과 강진을 오고 갈 때면 그 높이가 얼마나 높던지 담벼락 넘어서까지 짐이 보일 정도였다"며 "백목의 무게 또한 조부님이 지게를 짊어지고 마을 잔등을 지날 때면 끙끙 앓는 소리가 집 앞마당까지 들렸을 정도로 엄청났다"고 말했다.
 
최씨는 마을주민들의 교육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최씨는 "예부터 마을에 서당이 자리하면서 마을주민들의 교육열은 대단히 높았다"며 "이후 1940년대 당시 용두마을에서 광주서중학교와 광주사범대, 광주농업학교 등 5명의 학생들이 명문학교를 다니며 마을의 위상을 높였다"고 말했다.

최씨에 따르면 당시에는 병영면 내에서도 광주서중과 광주사범대 등의 학교에 입학했던 학생이 드물었다고 한다.
 
끝으로 최씨는 "예전에는 대보름에 인근 마을 주민들과 불싸움도 하고 씨름, 줄다리기 등 다양한 놀이들을 마을주민들이 함께 했었다"며 "갈수록 젊은 사람들이 줄어 언젠가부터 행사들이 사라져 갔다"고 안타까워했다.

 


 

▶용두마을에 가면

   
예부터 용두마을은 두 개의 서당이 자리 잡으면서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마을에 서당이 위치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학문을 공부했고 인재 또한 많이 양성됐다.

이중 서당잔등의 구서당이라고 불리는 용강제는 연파 김병휘가 후학양성을 위해 세웠다.
 
용강제의 설립목적은 '사람으로서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는 취지에 있음을 알렸다.

한편 연파 선생이 타계한 후 서당이 맥을 잊지 못하자 그 편액을 뜯어다 마을회관에 붙여 놓았고 서당잔등의 용강제에는 연파선생의 추모계인 강수계의 이름을 따라 강수제라 편액이 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