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로는 황금알... 조선시대도 제주배 유치 경쟁 치열
제주항로는 황금알... 조선시대도 제주배 유치 경쟁 치열
  • 주희춘 기자
  • 승인 2011.01.21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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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소안도 주민들 제주배 거쳐 가게 한 제주목사에 '불망비'

▲ 완도군 소안도에 가면 조선시대에 뱃길을 닿게 해준 제주 목사에 공덕을 기리는 불망비가 지금도 세워져 있다.<강진신문 자료사진>

제주관광객 지난해 700만명, 뱃길이용 22%에 불과
"빠르고 편한 뱃길있으면 이용객 크게 늘 것"


전남∼제주간 항로 개설이 불붙고 있다. 목포·완도·고흥·장흥 등 4곳에서 제주간 카페리호를 운항하고 있는 가운데 강진에 이어 해남, 여수 등이 신규 항로 개설에 구체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각 자치단체가 제주 항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막대한 경제적 효과 때문이다. 전남도에 따르면 현재 목포, 완도, 고흥, 장흥 등 4곳에서 8척의 배가 하루 9차례 제주를 오가는 뱃길이 지난해 말 현재 150만명을 돌파했다. 이는 2009년 123만명 보다는 30%, 그리고 2005년(85만 명)보다는 2배 가량 늘어난 수치다.

올해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 수가 사상 처음 700만 명을 넘어섰는데 그 중 22% 가량이 전남에서 뱃길을 이용한 셈이다. 특히 지난해 8월 장흥 노력도~제주 성산포항을 운항 중인 오렌지호가 지난해 30만명에 가까운 승객을 유치함으로써 제주뱃길의 성공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혹자는 이같은 현상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는 과열경쟁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으나 여객회사 전문가들의 말은 다르다.

수치에서 볼 수 있듯이 제주 관광객 700만명 중 선박이 담당하는 여객 규모가 22%에 불과하다. 앞으로 편안하고 빠른 뱃길이 많이 생기면 배를 이용해  제주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훨씬 늘어난다는 판단이다.     

80년대 후반까지 제주에서 운송되는 감귤이 마량항을 통해 육지로 운송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마량항의 항만 여건이 좋지 않을 때라 주민들의 반대로 중간 기착지가 완도로 옮겨 갔지만 배가 항구에 닿는다는 것은 적지 않은 이익이 발생하는 일이다.

▲ 완도군 보길면 보길도는 추자도를 거쳐 가장 빨리 제주에 가는 길목이었다.<강진신문 자료사진>
배가 항만으로 들어오면 항만 이용료가 발생하고, 이를 하역하는 근로자들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또 화물을 야적해 놓을 땅이 필요할 것이고, 이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다수 필요하게 된다. 오렌지호는 장흥 지역에 하루 2천 여 명의 유동인구를 발생시키고 있다.

장흥군이 직접적으로 거둬들인 세외수입이 지난해 말까지 2억원에 달하고, 식당가와 풍물시장, 주유소 등이 벌어 들이는 직·간접적 수익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부산항이나 광양항 컨테이너 항만의 경우 대형 컨테이너 하나를 하역할 경우 자동차 한대를 수출하는 이익에 버금가는 부가가치가 창출된다는 보고가 있다. 오늘날은 자유시장경쟁 체계인 만큼 각 회사들이 노선 경쟁을 벌이고 있으나 조선시대 때에는 도회지라고 해서 강진과 해남, 영암이 1년씩 돌아가면서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 됐다.

탐라지초본 제주구례조('耽羅誌草本' 濟州舊例條)의 도회관 주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영암과 해남, 강진 세고을에서는 매년 윤번을 정하여 신구영송의지지, 월령진상의 수운 및 공엽의 왕래를 담당하며, 상인이 제주도에 들어오는 경우에는 도회관의 공문이 있어야만 비로소 바다를 건너는 일이 허락된다'

또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1794) 12월 28일자 기록에는 '제주 세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강진, 해남, 영암이 도회를 나누어 정해서 각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한다'고 했다.

김상헌(1570∼1652)의 '남사록'에는 <강진·해남 두 현은 모두 바다에 있다. 무릇 제주를 왕래하는 공행(公行)은 반드시 여기에 와서 배를 탄다. 해남은 관두량(館頭梁)이고 강진은 백도도(白道島), 영암의 이진포(현재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가 강진과 서로 붙어있기 때문에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세 곳에 모이고, 매년 강진ㆍ해남 양읍(兩邑)에서 모여 관섭(菅攝) 호송하는 일을 윤번을 정한다>고 적었다.

도회지에는 반드시 후풍처(候風處)가 있었다.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돛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서는 북풍이나 북동풍이 불어야 했기 때문에 후풍처에서 기다리며 적당한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주로 들어가는 중간에 후풍처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에서 51㎞ 떨어져 있는 완도군 소안도에 가면 재미있는 비석이 두개 세워져 있다. 면소재지라고 할 수 있는 비자리 입구에 있기 때문에 소안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비석이다.

하나는 '제주목사백공락연영세불망비(濟州牧使白公樂淵永世不忘碑)'이고, 하나는 '(제주목사심공연택영세불망비(濟州牧使沈公賢澤永世不忘碑)'이다.

백락연은 고종 14년(1877) 정월에서 18년 5월까지, 심연택은 고종 20년 5월부터 21년 12월까지 제주목사로 재임한 사람이다.

1977년에 발행된 완도군지에 따르면 이들의 영세불망비가 비자리에 세워진 것은 그들이 소안도에 제주와 육지간에 선박 기항지를 두게해서 소안도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으로 소안도 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소안도는 이들 현감 때문이었는지 조선후기 제주와 육지를 잇는 대표적인 길목 역할을 하게 된다.

길목이란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후풍처(候風處)를 말하는 것이다. 강진의 남당포나 해남의 관두량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뱃길은 섬과 섬 사이를 따라 온다. 이 일대는 뱃길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날이 저물다 싶으면 언제든지 가까운 섬으로 피신하면 그만이었다.

보길도는 인근 소안도와 함께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과거 바람에 의지해 풍선을 타고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보길도나 소안도에 잠시 쉬면서 좋은 바람을 기다렸다. 옛말로 후풍처(候風處)란 곳이다. 지금은 청별항이 보길도의 주항이 됐지만 예전에는 청별항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황혼포구가 거대한 포구였다.

지금 활성화돼 있는 완도~제주 직항은 1970년대 후반에 생겨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목포에서 배가 다녔고, 조선시대 때에는 강진의 남포나, 해남 화산면의 관동리 관두포, 해남 북평면의 이진(이곳은 조선시대때 영암의 땅이었다) 등에서 출발해 중간에 보길도나 소안도 등을 거쳐갔다.

날씨가 좋으면 당일에 제주에 도착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보길도나 소안도에서 하루 이틀 묵어 갈 때가 많았다.

보길도 역시 제주와 호남의 해양교류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 항해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목측항해, 다시말해 뱃사람들이 목적지를 눈으로 보면서 배를 몰던 방법이 일상적이었다.

보길도는 육지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이 섬 저 섬을 보면서 도착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이자, 이곳에 도착하면 추자도가 눈에 잡힐 듯 들어왔고 추자도에서는 다시 제주도가 보이는 곳이어서 제주도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길목으로 자리 잡았다. 

보길도는 추자도와 가장 가까운 유인도이다. 직선거리로 18㎞다.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 보길도의 보옥마을 보길도의 최남단 지역이면서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제주도~추자도~보길도 거리가 73㎞다. 이곳에서 제주와 연결하는 해저터널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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