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줄다리기
강진의 줄다리기
  • 강진신문 기자
  • 승인 2003.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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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국<전 서강대학장>

내가 어렸을 때 본 강진의 동서 양진영이 승부를 겨룬 줄달리기는 그 규모 참가자의 열기 민속 민속놀이의 화려한 면에 있어서 인근 장흥, 해남, 영암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강진의 줄달리기도 총독부의 한국 고유문화말살정책에 휩쓸려 1930년을 계기로 그 자태가 사라졌다.

줄달리기는 음력 정월 10일 전후 시작되어 대보름날 전에 승부의 판가름이 났다. 동서 두진영의 분기점은 읍사무소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이 아니였던가 싶다.

 

양 진영은 서쪽은 김현문씨, 동쪽은 김병채씨 등 청년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지휘체계와 조직이 확립되어 있었다. 처음은 애들이 저희들끼리의 줄달리기로 시작하여 차차 규모가 커져 도서대항의 본격적인 줄달리기로 발전하였다.

 

“애들 줄달리기가 어른 줄달리기가 된다” 는 속담이 나돌았다. 그 당시 가세가 넉넉한 집안은 가을철에 각자의 소유산에서 겨울 한동안 땔나무를 벌목하여 집안에 또는 집 근처에 쌓여 두었다. 이들 나무단은 새끼로 묶어져 있어 여기서 나온 새끼가 애들 줄달리기 시작에 계기를 제공해준 것이다. 애들은 나무를 쌓아 둔 집을 골라 돌아다니며 “나꾸주시오, 나꾸주시오” 구걸하여 새끼를 모아 온 것이다.

 

줄달리기가 동서대항의 줄달리기 단계에 도달하면 본격적인 준비가 양진영에서 시작된다. “기계새끼가 바리바리 실려오고 ‘동빠(비율빈산 대마섬유로 짠 줄)도 실려온다. 수백명의 주민들이 동원되어 북장단에 맞추어 ”도세라 도서라” 하며 줄을 뽑아낸다.

 

이렇게 완성된 줄은 길이가 약 50m가까이 되고 ‘고’대목은 그 위에 사람들이 줄줄이 서있을 수 있을 정도 크기의 둘레가 되였다.

 

줄달리기에 출전한날은 청년지도자들이 고운 한복과 색색 비단의 마고자를 꾸며 입고 머리에는 화려한 고깔를 쓰고 줄 위에 줄을 지어 늘어섰다. ‘고’대목에는 설소리꾼이 서서 고운 목소리로 덕담이 넘쳐흐른 선창을 하면 줄을 띰고 가는 줄꾼들은 “상사듸여 상사듸여”하고 후렴을 하였다. 그 행렬은 일대장관이였다.

 

동서분기점에서 고거리가 이루어진다. 서쪽의 고는 숫컷, 동쪽의 고는 암컷을 상징하였다. 고거리는 양쪽 청년장사들의 힘겨루기판이 되였다.

고거리가 끝나면 줄달리기가 시작 되는데 주야 3,4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되였다. 밤에는 줄을 가로수에 꼭 묶어놓고 쌍방 합의하에 밤 동안 휴전상태에 들어간다.

 

이때에 후원자들 집에서 쌀가마니로 지은 밥으로 김밥을 마련하여 실려 온다. ‘고’ 줄은 김밥을 먹으며 교대로 감시한다. 날이 새면 줄달리기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힘이 딸려 끌려간 축은 줄위에 앉아 “돈안주고 서창가 돈안주고 서창갚를 되풀이 외치며 역전을 시도하였다.

줄달리기는 번번히 서쪽 승리로 끝났다. 인구수는 동서가 비슷하였는데 서쪽의 조직이 능률적이고 동원이 전투적으로 이루어져서 그랬던가 싶다.

 

어쩌다 동쪽이 승리를 하였다. 동쪽은 기뻐날 뛰며 곧 줄을 메고 서성리로 승전행렬을 떠났다. 행렬이 서성리 압구재에 도달하였다. (압구재는 서성리에서 탑동으로 내려가는 지금의 영랑생가로 들어가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재) 이때 압구재 높은 곳에 있는 인가에서 행진하고 있던 서쪽의 줄꾼들이 승전행렬에 인분을 내려뿌렸던 것이다.

 

승전행렬은 오물속에 허우적거리며 허둥지둥 달려왔다. 돌아오자마자 동성리 죽동 김후식씨 소유 대밭으로 달려가 청대를 잘라 대창을 수십자루 마련하여 들고 압구재에 달려갔다. 그러나 인분세례를 퍼부은 서쪽 줄꾼들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리 없었다. 허사로 돌아와 이중으로 웃음꺼리가 된다.

 

줄달리기는 간첩전의 양상도 띠고 있었다. 줄의 어느 대목을 칼로 베면 그 자리에서 줄이 끊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상대방 줄에 칼로 금을 낼 수 있는 민첩한 사람을 골라 파견하였다. 양진영에는 이러한 사명을 띠고 온 간첩을 염탐하여 잡아내는 수색대가 있었다. 수상한 사람이 발견되면 곧 세밀한 몸수색을 당하고 만일 칼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죽도록 뭇매를 맞았다.

 

당시만 해도 줄달리기는 남성의 점유물이였다. 만일 여자가 줄을 넘으면 줄이 그 자리에서 끊어진다는 미신이 널리 퍼져 있어 여자들은 줄 근처에는 아예 오지를 않았다. 다만 멀리서 줄 구경을 할 뿐이였다.

지금 회상하면 그때 강진은 태평성대하에서 일제의 앞제하에서나마 생의 즐거움을 구가하지 않았나 싶다.

 

강진의 줄달리기는 민속문화재로서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과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은 강진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의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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