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앞에는 금강천, 뒷쪽은 황금 들판
마을 앞에는 금강천, 뒷쪽은 황금 들판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11.19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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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면 발천마을

▲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 너머 널따란 들판과 야산이 발천마을의 풍광을 더하고 있다. 한 때 발천마을은 마을의 형태가 승려의 바리때와 같다고 하여 발내라고 불리기도 했다.

풍성한 강물과 기름진 농토 자랑...침수피해도 자주 입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이 성큼 다가오면서 제법 쌀쌀한 날씨가 옷깃을 더욱 여미게 만든다.

온 산야를 붉은 빛으로 물들였던 단풍나무도 앙상한 가지만을 드리우고 도로변에는 힘없이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가고 있다.
 
노란 은행잎 사이에서 열매를 줍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발길을 향한 곳은 병영면 발천마을.

군동~작천 간 까치내제를 지나 작천삼거리에서 병영면소재지 방면으로 3㎞를 가다보면 좌측방면으로 발천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2.5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표지석에는 '살기 좋은 발천마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있다.
 
이곳에서 널따란 평야를 지나 1㎞를 더 달리다보면 금강천을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 발천마을은 잦은 침수피해로 인해 마을회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공건물들이 평지에서 1m이상 높이를 두고 있다.
발천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크게 본터와 새터로 나뉘어 있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가옥들이 모여 있는 본터에는 현재 19가구가 들어서있다.

회관에서 마을상수도가 위치해 있는 방면으로 위치한 곳은 새터로 8가구가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다.
 
사면이 평야로 둘러싸인 발천마을은 마을의 형태가 승려의 바리때와 같다고 해서 발내(鉢乃)라고 불리다가 마을 앞에 위치한 금강천을 따라 발천이라 불리게 됐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 김해김씨가 마을에 처음 입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탐진최씨, 전주이씨 등이 이거해 오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23호 40여명의 주민들이 대부분 벼농사 위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마을입구를 지나 우산각 앞으로는 1m이상 높은 지대에 마을회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제법 길게 늘어선 계단의 모습이 회관의 웅장함을 더하고 있는 듯했다. 마을회관 벽면 한 쪽에는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주민들의 정다운 모습 또한 엿볼 수 있었다.
 
발천마을의 가장 큰 특색은 마을회관을 비롯해 우산각, 공중화장실, 마을창고 등이 평지에서 1m이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었다.  
 
이에 주민 강영두(84)씨는 "예부터 마을은 인근에 위치해 있는 방죽으로 인해 여름 장마철이 되면 상습침수지역이 많았다"며 "잦은 침수가 발생하다보니 공공건물들은 대부분이 평지에서 1m이상 높이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예부터 발천마을주민들은 금강천으로 인한 지리적 혜택을 많이 받아온 만큼 이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가옥들의 위치가 제방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침수피해를 자주 겪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발천마을은 지난 2006년도에 집중호우로 인해 가옥 전체가 빗물에 잠기는 대규모 침수피해를 겪었다.

당시에는 금강천이 마을로 범람해 1m높이까지 물이 차면서 주민들은 소방당국에서 마련한 보트 등을 통해 인근 중고마을로 대피하는 소동까지 발생했었다고 전했다.

당시 침수로 인해 발생한 재산피해만도 5억여원에 달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발천마을 곳곳에서 구멍이 뚫린 하수구뚜껑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하수구뚜껑이 주택 골목 10m구간에 50㎝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어 침수에 대한 주민들의 불안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 예부터 마을주민들은 정자나무 아래 놓인 바위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이렇듯 잦은 침수는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주택이나 창고 등에 설치한 환기구멍을 벽면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1m이상 높이를 두고 설치하는가 하면 땔감이나 주요 생필품을 보호할 수 있도록 지붕천장에 받침대를 설치해 둔 가옥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만큼 불편이 따랐지만 주민들로써는 최선의 방법이자 수단이었다.
 
하지만 자연의 재해 속에서 늘 가슴앓이를 해왔던 발천마을 주민들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소득마련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0여년 만에 마을에 오이재배 하우스가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담수농법을 이용한 친환경재배방식도 발천마을 주민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담수농법은 겨울철 논에 물을 담아 경운작업 등을 줄이고 토양의 질도 높여주어 미질의 품질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친환경재배방식을 통한 브랜드 쌀 개발에 앞장서고 있는 것 또한 발천마을주민들이다.
 
주민 최창도씨는 쌀겨, 우렁이, 참게를 이용한 친환경농법으로 개인브랜드 쌀을 만들어 대도시 소비자들에 직접 판매하고 있다.

또 몇몇 주민들은 타 도시 견학활동을 통해 친환경농업 정착과 농산물 고품질화를 위한 방안을 마련해가고 있었다.

▶마을에서 만난사람  이천만 할아버지
"아픔과 고통 많이 겪었지만 꿋꿋하게 이겨내"

자택처마에 앉아 콩을 고르는 작업을 하고 있던 주민 이천만(79)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씨는 메주를 빚기 위해 마당에서 재배한 콩을 수확해 선별하고 있던 중이었다.
 
7년 전 부인과 사별해 홀로 살고 있다는 이씨는 "부인을 떠나보낸 뒤로 생활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다"며 "점심식사는 노인회관에서 제공해주는 음식으로 해결하고 있지만 아침과 저녁을 거르는 경우가 많다보니 몸도 많이 쇠약해진 것 같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노환으로 기력이 쇠퇴해져 걱정이라는 이씨는 "틈틈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다리운동을 하고는 있지만 끼니를 제 때 해결하지 못하다보니 체중이 갈수록 줄고 있다"며 "매일 눈물을 머금고 하루를 살고 있는 것 같아 한탄스러운 때가 많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현재 2,640㎡(800여평)의 면적에 벼농사를 짓고 있는 이씨는 "올해는 병충해를 입어 많은 수확을 거두지 못해 아쉽다"며 "거름을 많이 뿌려서 인지 나락 색상도 검게 변해버려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을에 대해 이씨는 "침수피해를 자주 겪어온 터라 생활에 많은 어려움은 따랐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이어가는 주민들의 강인한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발천마을이 있는 것 아니겠냐"며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고 살아온 터라 서로에 대한 애정이 많아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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