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겹게 자리한 마을 서기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정겹게 자리한 마을 서기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11.05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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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 월남마을

▲ 서기산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가옥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월남마을은 서기산자락의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영향으로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마을주민들은 지난 1940년 중반까지 땔감판매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서산교회 101주년 역사, 한때 서원도 존재
주민들 도라지, 더덕 많이 재배

휑한 들녘을 따라 퍼져나가는 쌀쌀한 가을바람이 매섭기만 하다.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에 가을 흔적은 사라지고 들녘은 온통 겨울로 접어드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어느덧 무성했던 옷을 벗어내고 앙상한 가지만을 한껏 드리우고 있는 농촌의 풍광은 계절의 변화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계절의 변화를 따라 발길이 머문 곳은 강진읍 월남마을. 강진의료원에서 2차선 (구)도로를 따라 성전방면으로 5㎞정도를 가다보면 좌측방면으로 향일, 옥치방면으로 향하는 군도7호선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1㎞를 달리다보면 굽이굽이 펼쳐진 좁다란 마을진입로를 볼 수 있다.

마을진입로를 따라 다시 1.5㎞를 더 달리다보면 서기산(해발 511m)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월남마을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월남마을은 마을중심을 관통하는 월남천을 중심으로 크게 두 대로 나뉘어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회관 건너편에 위치한 가옥들은 1반으로, 회관주변이 2반에 해당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과거에는 월남천을 중심으로 4개 반까지 나뉘어졌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이 중 회관 동쪽(현 서산저수지 부근)에 위치한 4반에는 과거 봉서원이 있었다고 하여 이곳을 서원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960년대 초반 서산제가 축조되면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마을의 설촌과 관련해 주목할 점은 1590년(선조23년)에 창건된 서봉서원이다. 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거되었지만 창건 이후 300여 년간 명맥을 유지해왔고 이는 일찍이 월남마을에 촌락이 들어서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 마을회관, 우산각, 정자나무가 조화를 이룬 채 농촌의 풍광을 더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아담한 돌담길이다.

돌담길 위로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들이 농촌의 예스러운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여기에 산자락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물이 월남천을 따라 마을중심을 지나고 강진읍에서 가장 높다란 서기산은 가옥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주민 한석철(73)씨는 "하천이 마을중심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것이 월남마을의 가장 큰 특색이다"며 "이곳은 1950년대까지 은어를 비롯해 민물장어가 많이 서식하면서 곳곳에 통발이 즐비 했었다"고 말했다.
 
현재 마을중심을 따라 뻗어 있는 월남천은 지난 1950년대 서산저수지 축조로 인해 장어와 은어 등의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하천에 통발을 놓고 송사리 등의 물고기를 잡는 주민들이 간혹 있다고 한다.
 
산자락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 있는 것도 월남마을만의 특색이다. 월남마을은 지난 1909년 관내에서는 처음으로 교회가 설립된 마을로 기독교가 번성해있다.

이렇다보니 주민들 90%이상이 신앙생활을 이어왔고 신앙 활동을 매개체로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력을 높여 나갔다. 
 
현재 마을 중심에 위치한 서산교회는 지난해 7월 창건 100주년을 맞이할 정도로 마을의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월남마을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마을주민 대부분이 화목보일러를 난방기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서기산 줄기의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민들에 따르면 1945년대까지 월남마을에는 87호에 500여명이 넘는 주민이 거주하는 대촌을 이루었고 당시 주민 대부분은 땔감판매에 나서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땔감수요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자 점차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을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현재는 40호 70여명의 주민들이 미맥위주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 월남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돌담길이다.
이전 마을주민들이 서기산의 산자락을 통해 땔감을 얻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갔다면 현재 주민들은 어떠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까.

그 해답은 연한규 마을이장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윤 이장은 "지난1990년대 후반부터 도라지, 더덕 등의 재배가 시작되면서 현재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재배에 나설 정도로 활성화되었다"며 "대부분의 재배단지가 산자락 밑에 위치하고 있어 불편은 따르지만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마을을 둘러보는 내내 주민들은 최고의 산수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월남마을의 가장 큰 자랑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높다란 서기산을 품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은 월남마을.

서산제 넘어 펼쳐진 들녘과 산자락 아래 들어선 밭들이 농촌의 풍요로움을 더하고 있다.

여기에 산자락을 병풍삼아 즐비해 있는 돌담은 농촌의 예스러움을 풍기고 마을 중심을 지나는 하천 또한 그 멋을 뽐내기에 충분했다.
 

인터뷰 - 월남마을 주민 박양규 씨
"수입 일정치 않아 걱정"

쌀쌀한 날씨를 맞아 화목보일러에 불을 지피기 위해 장작을 마련하고 있던 주민 박양규(73)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박씨는 밭 2644㎡(800여평)의 면적에 도라지, 더덕 등을 재배하고 있다.
 
이에 박씨는 "지난 1990년대 더덕재배에 나서면서 3~4년에 한 번 정도 수확시기를 갖고 있다"며 "재배 초기에는 한 해 300여만원의 소득을 올렸는데 이는 당시 많은 벼를 수확하는 것과 비슷한 이익을 봤다"고 말했다.
 
올해 재배 수준에 대해 박씨는 "더덕은 재배기간이 길어 해마다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며 "가격 또한 현재 4~5년산 더덕은 2㎏ 3만~4만원에 거래되고 있어 예전보다 돈벌이는 신통치 않다"고 밝혔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박씨는 화목보일러에 연신 땔감을 집어넣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에 박씨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화목보일러를 처음 설치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난방효과도 뛰어날뿐더러 마을 인근에서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 설명했다.
 
농촌생활에 대해 박씨는 "나이가 들면서 농사일이 고되다 보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일쑤다"며 "이러한 탓에 올해 초에는 둘째 아들이 귀농을 결심하고 내려와 농사일을 돕고 있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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