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판 사이로 금강천이 휘돌아 나가고
넓은 들판 사이로 금강천이 휘돌아 나가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10.08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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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천면 상남마을

▲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 넘어 널따란 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상남마을은 금강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오늘날 마을 일대에 30㏊에 이르는 넓은 평야를 이루게 되었다.

군동, 병영, 작천으로 갈리는 길목...
예전 주민들 상업에 많이 종사

수확의 계절을 맞은 10월. 널따란 평야를 자랑하고 있는 작천면으로 향했다. 황금빛 평야를 지나 잠시 발길이 머문 곳은 작천면 상남마을.

작천면소재지에서 병영방면으로 가는 지방도 814호선을 따라 0.5㎞를 가다보면 우측으로 군동으로 향하는 군도5호선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100여m를 더 달리다보면 도로 우측으로 상남마을을 볼 수 있다.

병영면소재지가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상남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크게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현재 상남마을에는 윗마을 8가구, 아랫마을 29가구 등 총 37호 5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들녘을 배경으로 300여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상남마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상남마을은 효동(孝洞)이란 지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효경동(孝敬洞)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효동이 됐다고 전해진다.

효동은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늘날 다시 상남으로 개칭됐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마을주민들은 상남마을 보다는 효동마을이라는 지명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마을 도로명이 효동1길과 효동2길로 표기되어있는 것도 이러한 주민들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 했다.   
 

▲ 요즘 상남마을 주민들은 수확시기와 더불어 밭갈이에 나서는 일로 분주한 모습이다.
상남마을은 금강천변을 끼고 마을이 형성된 지역이다.

이는 오늘날 상남마을 일대에 넓은 평야를 이루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됐다.  
 
특히 상남마을은 지난 1960년대까지 작천면 일대에서 상업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지역 중에 한 곳이다.
 
마을에 대해 김갑수 이장은 "지난 1960년대 당시에는 마을 내 10여 가구 정도가 집안에 일꾼 한 두명을 데리고 살았을 정도로 부자들이 많이 거주했던 고장이었다"며 "이는 마을주민 대부분이 다양한 상업 활동에 나서면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마을에는 병영과 작천면소재지 일대에서 방앗간을 비롯해 두부가게, 약방, 술집, 이발소 등의 상가를 운영하는 주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 병영장과 강진, 장흥장을 통해 죽세품, 약초, 지물·포목 등을 팔러 다니는 주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같은 모습은 상남마을의 지리적 특성을 통해서 풀이해 볼 수 있다. 상남마을은 작천에서 병영을 오고가는 길목에 인접해 있다. 여기에 병영과 군동을 오고가는 주민들은 상남마을 앞을 거쳐 이동했다고 한다.

때문에 상남마을 일대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그만큼 인적교류를 통한 물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설명이다.   
 
또한 상남마을 주민들은 금강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 병영면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는 병영상인들의 활발한 상업 활동이 자연스레 상남마을 주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마을 주민들은 다양한 견문과 지식 등을 발판삼아 여러 장을 오가며 상업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 기와지붕 형태의 일반 가옥 형태를 갖추고 있는 마을회관은 옛 풍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농현상이 급속도로 가속화되었고 상남마을 역시 다른 농촌마을과 더불어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마을에서는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미맥으로 인한 소득이외에 특별한 소득원이 없다는 점과 마을이 북향인 지형적 영향으로 타 마을에 비해 기온이 낮아 작물재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면서 생산품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다행스러운 부분은 마을 앞으로 형성된 널따란 농경지가 주민들의 삶을 꾸준히 이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상남마을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농경지는 대략 30여㏊.

이중 논이 27㏊로 전체 농경지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이러한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친환경재배단지로 변모를 거듭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상남마을은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효경동으로 불렸던 마을이다.

그만큼 마을주민들은 경로효친사상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왔고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주민들에게 깊은 교훈으로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세상을 가장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입을 모으는 상남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마을을 이끌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늘 젊은 활기로 가득한 채 새로운 농촌사회로 변모하고자 오늘도 분주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글·사진=김응곤 기자

■인터뷰  상남마을 최고령자 양재선 씨
"情 나눌수 있는 사람 많아 큰 행복"

마을을 둘러보던 중 마당에서 손빨래를 끝내고 옷을 널고 있는 양재선(86)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9월까지 6년 동안 상남마을 노인회장을 역임했던 양씨는 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는 남성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지난 2001년과 2002년도에 잇따라 넷째 딸과 부인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양씨는 지난 9년 동안 매일 같이 자식과 부인에 대한 그리움에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고 전했다.
 
이에 양씨는 "나이가 들다보니 머리가 둔해지고 그러다보니 슬픔과 아픔도 점점 무뎌져만 가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프다"며 "그나마 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주민들이 옆에 있어 위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부인이 떠난 후로 농사를 짓지 않고 있다는 양씨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1,322㎡(400여평) 정도에 감나무를 심어 관리하고 있다"며 "올해는 잦은 비로 인해 많은 수확을 거두지 못할 것 같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3남3녀를 두고 있는 양씨는 "광양에 살고 있는 둘째아들 내외가 한 달에 한 두 번씩 찾아와 반찬이며 옷가지 등을 챙겨주고 있다"며 "홀로 사는 노인이지만 집안 청소며 빨래 등을 매일 같이하고 있어 때론 자식들이 깜짝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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