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 앞산과 뒷산이 용의 형국
[마을기행] 앞산과 뒷산이 용의 형국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9.17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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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천면 용동마을
▲ 마을 안길을 따라 늘어선 가옥들이 넓은 들판을 마주보며 위치해 있다. 용동마을 안길은 지난2008년 농수로 덮개공사와 포장공사가 마무리 되면서 주민들의 이동이 더욱 편리해졌다.
주민들 화합심으로 유명... 씨름선수 많이나와

용동마을은 고려 성종 때(981~997) 장흥 마씨들이 이거해오면서 터를 잡은 곳이라 하여 마건리라 불렸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지명은 조선시대말에 접어들어 당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앞산과 뒷산의 형국이 용(龍)과 같다고 하여 용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었다.

현재 용동마을은 26호에 거주하는 주민 대부분이 미맥위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마을 주민이 몇 명 되지 않다 보니 용동마을 주민들은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 성씨가 다른 각성바지 마을이지만 주민들은 누가 아프면 너나 할 것 없이 아픈 사람을 챙겨 보살펴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또 수시로 찾아가 상태를 지켜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주민 마선규(67)씨는 "여느 시골마을이나 주민들이 한 평생을 같이 해오다 보니 단합이 잘되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냐"며 "용동마을 주민들은 예부터 여거 성씨들이 모여 지내다 보니 친형제나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이날 마을자랑에 여념이 없던 용동마을 이제국(53)이장 역시 주민들의 협동심과 단결력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이에 앞서 용동마을이 가장 번창했던 지난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이어보자.

▲ 마을 진입로에 놓인 정자나무와 우산각이 조화를 이루며 오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당시 마을주민들은 씨름, 짚신밟기 등 민속놀이를 이용한 다양한 축제를 즐겨했다.

특히 윗마을에 위치한 용정마을 주민들과 마을대항으로 줄다리기를 즐겨했고 씨름 또한 주민들이 가장 즐겨하던 놀이 중 하나였다.

특히 당시 용동마을에는 힘이 쎈 청년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힘을 겨루는 씨름이나 줄다리기 등이 마을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면서 용동마을은 씨름으로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관내에서는 칠량면 주민들이 씨름 잘하기로 소문났다. 군동과 대구면 주민들 또한 씨름 실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때문에 용동마을주민들이 이 지역주민들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할 때면 자연스레 마을잔치가 열리기 일쑤였다.

특히 씨름대회에서 우승했을 경우 상금은 송아지 한 마리였다. 당시에는 소 한 마리가 반 살림이었고 소 한마리 가격이면 논 2,644㎡(800여평) 정도를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매우 큰 상금이 아닐 수 없었다.
 
용동마을은 소가 많아 소마을이라고 불렸다. 이는 당시 주민들이 소를 많이 키우기도 했으나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송아지를 많이 가져갔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이만큼 마을주민들은 씨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단합을 높여갔고 더불어 화합을 이뤄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까지 빛을 바라고 있다. 용동마을은 작천면민 체육대회에서 3회 연속 종합우승을 이루는 쾌거를 이뤘다. 이같은 성적은 작천면에서 용동마을이 유일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이와 더불어 용동마을은 지난 2007년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면서 마을의 이미지를 한층 높였다.

용동마을은 90% 이상이 미맥위주의 농업이다. 이에 항상 넉넉지 못한 생활이지만 주민들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치면 서로 나누면서 우애를 나누는게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이유였다.

▲ 농협에서 지급하는 소금을 구입하기 위해 회관에 모인 주민들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또 주민들은 가족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가 어느 마을보다 높은 협동심을 나타내는 것도 용정마을이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용동마을의 자랑은 이 뿐만이 아니다. 작천면 소재 마을에서도 경로효친사상을 중요시 여기는 마을 역시 용동마을이다.

이러한 모습은 효부상을 수상한 주민들이 많은 것에서도 느낄 수 있는 부분 중 하나이다.

주민 배회님(49)씨는 8년간 병든 시부모를 보살펴 오면서 지난 2004년 군수표창과 유림회장 표창을 받았다.

또 전남도지사와 군수표창 등을 수여받은 주민 박정재씨와 이안님, 박공님씨 역시 마을에서 소문난 효녀였다. 
 
현재 용동마을은 축산기술센터 설립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축산기술연구소가 마을에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인지는 미지수다.

다만 주민들은 적은 보상에도 불구하고 지역발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들이 평생 일궈온 경작지를 서슴없이 내놓았다.

그리고 지역이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하나로 피폐해져 가는 농촌마을에 작은 희망이 찾아들기만을 바랄 뿐이다.


◈ 인터뷰 - 용동마을주민 마정섭씨


"40년째 가계부, 영농일지 기록"
마을 내에서도 부지런하고 꼼꼼하기로 소문한 마정섭(79)씨를 만났다. 이날 마씨는 툇마루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꼼꼼히 적고 있었다.

지난 1970년도부터 가계부를 작성해오고 있다는 마씨는 이날 장에서 구입한 물건들을 하나씩 가계부에 적고 있었다.
 
마씨는 "나이 마흔살에 가계부를 쓰기 시작해 올해로 40년째 가계부를 써가고 있다"며 "이와 함께 40여년 째 써온 영농일기는 지난해 농사를 그만두면서 함께 끝을 지었다"고 말했다.
 
이어 마씨는 "어린 시절부터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늙어서까지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 같다"며 "지난 40여년간 작성한 영농일기는 풍년, 흉년, 기후, 강우량 등을 적어가면서 농사짓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고 해마다 이를 활용하기 위해 작성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마씨는 2남2녀의 자식들을 모두 대학 보내고 출가시켰다.

지난해부터 농사일을 포기했다는 마씨는 "이제는 나와 부인의 건강을 위해 남은 세월을 보내고 싶다"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자전거를 타고 있지만 세월의 흐름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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