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 기름진 들녘너머로 탐진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마을기행] 기름진 들녘너머로 탐진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9.10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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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동면 장항마을
▲ 군동면 장항마을은 용이한 농수확보와 우수한 토질을 갖추고 있어 예부터 기름진 들녘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특히 장흥과 군계지역에 위치해 있는 탓에 주민들이 장흥을 오가며 장흥지역민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군 경계에 위치해 장흥주민들과도 교류 활발

한여름 뙤약볕 아래 땀 흘린 농부들의 결실이 다가오는 계절이다. 늦더위가 막바지 열기를 내뿜고 있지만 계절은 어느덧 가을의 정취를 풍겨낸다.

나날이 황금물결을 이뤄가는 들판은 가을의 풍성함을 더없이 담아내고 있다. 
 
황금물결을 이뤄가는 들녘을 따라 향한 곳은 군동면 장항마을. 군동면소재지에서 군도 14호선을 따라 장흥방면으로 1.4㎞를 달리다보면 우측방면으로 삼신리 방면으로 이르는 석교다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다시 소도로를 따라 양산, 대곡, 중산마을을 지나 4㎞를 더 향하다 보면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항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항마을은 장흥과 군계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기름진 들녘과 탐진강을 마주하고 있었다.

장항마을은 예부터 기름진 들녘이 풍부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마을 곳곳에 샘이 많은 터라 농수확보가 용이했고 토질 또한 사토를 이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지형은 밭농사를 비롯해 비닐하우스 시설을 이용한 원예작물 재배에 제한이 따르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장항마을 주민들은 현재까지도 미맥위주의 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장항마을의 지명은 마을의 형국을 그대로 풀이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던 통천 최씨가 마을의 지형이 노루목형국이라고 하여 노루 장(獐)과 목 항(項)을 합쳐 장항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회관에는 천경태(66)이장을 비롯해 마을주민 몇 명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마을에 대해 천 이장은 "예전에 비해 주민수가 크게 줄었지만 마을의 애경사를 함께 하는 전통이 지켜지고 있다"며 "주민들 사이에 인정이 넘치고 화합이 잘되는 마을"이라고 마을자랑을 했다.
 
장항마을은 마을이 형성될 무렵인 1700여년 당시 통천 최씨 후손들이 거주해 살고 있었으나 집성촌을 이루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마을이 형성되고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성씨들이 함께 거주하게 되면서 마을이 다방촌의 형태를 이루었던 셈이다. 
 
이는 현재 마을주민들의 생활상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장항은 장흥과 강진의 군계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때문에 주민들은 장흥을 오가며 장흥지역민들과 교류가 활발했고 인근에 위치한 장흥 금안마을 주민들과 접촉도 많았다.
 
이쯤에서 주민 김광수(77)씨의 말문을 이어보자. 김씨는 "장항마을은 예부터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다보니 흔히 말하는 텃세가 없는 곳이다"며 "마을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주민들이 새마을지도자나 개발위원, 총무 등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같은 모습은 전쟁의 아픔을 함께 겪은 역사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항마을은 지난 1950년 6.25전쟁 당시 많은 피해를 입었던 지역 중 한 곳이다. 당시 전쟁으로 10여호가 넘는 가옥들이 전소됐고 사망자 또한 4~5명 정도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수 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쉼터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주민들이 강진신문을 살펴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군동면에서 전쟁의 피해를 전혀 겪지 않았던 마을과 비교해보면 상당한 피해였던 셈이다.

주민 수가 급격히 감소해 마을이 쇠퇴기를 걷는 시기도 이때부터였다.

때문에 전쟁의 아픔을 겪어온 주민들은 폐허가 된 마을을 복구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했다.

또한 갈수록 감소하는 인구수를 막기 위해 마을로 이사 온 외지인들이 마을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방법 중의 하나로 이들에게 다양한 업무와 역할을 맡겨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장항마을은 한때 70여호가 살던 대규모 마을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산업화 등으로 이농현상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현재는 23호가 거주하는 소규모 농촌마을로 변모하게 됐다.
 
장항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3월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보통 마을에서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제를 올리는 경우는 당산제 등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날 장항마을 주민들은 마을에 거주했던 조서운씨를 위한 제사를 지낸다. 조씨는 인근 대월마을에 거주하다 지난 1970년대 장항마을로 이사 온 여성이다.
 
당시 조씨는 남편을 일찍 여위고 자식이 없었다. 이 때문에 조씨는 남편의 대를 잇지 못했다는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씻어내기 위해 김해 김씨 제각을 세워 조상의 혼을 달래고자 했다.

조씨의 이러한 뜻을 함께 해주며 제각설립에 힘을 모으고 앞장섰던 사람들이 장항마을 주민들이었다. 이러한 고마움을 늘 간직하며 살던 조씨는 마을에 5,280㎡(1천600평)의 땅을 희사한 채 지난1993년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마을주민들은 조씨와 그녀의 남편을 위한 제를 13년째 올리는 일을 잊지 않고 있다.   
 
현재 장항마을의 인구수는 38명이다. 이중 50대 미만은 단 5명에 불과할 정도로 젊은 일손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은 점점 피폐해져가는 농촌의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마음을 열고 오는 이들을 반기는 삶의 자세를 계속하다보면 언젠가는 많은 이들이 마을로 찾아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순후한 장항마을 주민들의 모습 속에 농촌마을의 미래가 더욱 밝아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인터뷰 - 마을노인회장 김영내 씨


"전쟁의 아픔 지금도 생생"
지난해부터 노인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영내(81) 회장은 지난 1950년대 당시 마을의 모습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김 회장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들이 마을까지 들이닥쳤다"며 "인민군들이 당시 집에 혼자 머물고 있던 큰 형수를 사살하고 집을 불태웠다"고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김 회장은"당시 나는 읍내에 나가있어 화를 면했지만 당시의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덧붙였다.
 
또 김 회장은 "전쟁으로 인해 군에 입대했을 때가 22살 때였는데 당시 광주, 서울 등으로 올라가 싸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지리산토벌작전 중에 인민군 한명을 생포하는 공을 세워 화랑금상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마을에 대해 김 회장은 "부모와 형제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이웃 간의 정은 더할 나위 없이 깊을 수밖에 없다"며 "잘 사는 부촌마을은 아니지만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아는 주민들이 있어 좋을 뿐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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