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구특집]현구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현구특집]현구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 김철
  • 승인 2003.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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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영랑 버금가는 강진의 대표적 인물

30년대 영랑선생과 함께 서정시를 이끌었던 김현구시인의 특별전이 열리면서 시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현구시인은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에서 아버지 김노식씨와 어머니 김광자씨의 10남매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현구시인.

 

같은 김해김씨로 영랑선생의 조카벌에 해당하는 현구시인은 강진경찰서 자리인 관서제에서 영랑선생과 함께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강진보통학교(현 강진중앙초등학교)에 1911년에 입학한 현구시인은 1학년을 마친후 2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1914년에 다시 재입학을 하게 된다. 당시 성적표를 보면 현구시인의 성적은 우등생이였다.

 

국어에서 10점만점에서 9점과 4학년때는 10점 만점을 받았고 반전체에서 3학년때는 5등과 졸업때인 4학년때는 2등의 성적을 나타낸다. 학업성적이 뛰어난 현구시인이 보통학교를 입학해 2년간 휴학을 한것과 졸업후 배재학당을 다니기까지 2년여간의 터울은 당시 현구시인의 가정형편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했던 현구시인은 당시 엘리트계층이 다니던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배울것이 없다며 고향강진으로 내려와 북산의 병풍바위와 비둘기바위등을 벗삼아 시를 쓰다가 다음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가정사정으로 길지않은 유학길에서 돌아온 현구시인은 영랑선생과 함께 청구 동인집 발간 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1927년 부인 홍충덕씨와 결혼한후 시를 쓰던 현구시인은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등 4편의 시를 시문학 2호에 발표하면서 시단에 등단한다. 시문학지에 이어 문예월간과 문학 창간호에 잇따라 시를 발표하던 현구시인은 강진읍 서성리 214번지로 분가하면서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강진읍사무소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한다.

 

군청,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면서 193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던 현구시인은 1934년 시문학파의 해체와 함께 공식적인 시단활동을 중단하고 혼자서 시작업에 몰두한다. 시문학사에서 현구시집을 준비중이였지만 용아 박용철의 사망으로 출간되지 못했고, 현구시인은 한국전쟁중인 1950년 사망하게 된다.

 

이번 열린 작품전시회에서는 새롭게 선보이는 사진들중에는 현구시인의 여러 가지를 엿볼수있게 한다. 현구시인이 다소 외골수적인 성격으로 주위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는 일말의 추측은 몇장의 사진으로 이를 말끔히 없애게 된다.

 

경주분황사에서 영랑선생등과 함께 어울려 찍은 사진과 금강산 비로봉에서 찍은 사진은 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현구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한곳에 소재를 두고 시를 썻던 영랑선생에 비해 강진의 풍광을 주로 담아냈던  현구시인이 우두봉을 올라서 한눈에 보이는 강진을 찾기를 좋아했다는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 하나는 현구시인의 호인 현구(玄鳩)이다. 평소 검정두루마기를 자주입었다는 당시 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붙여졌던 현구(玄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힘들다는 점이다. 현구작품전에서 진열된 사진속에 나타난 현구시인의 모습은 양복을 입었거나 결혼식장에서도 흰두루마기를 걸쳐있은 것으로 나타나 이를 입증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현구라는 호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평소 흰색, 붉은색, 만가지색을 다들어있는 오묘한 색깔로 검정색을 좋아했던 현구시인의 색깔론에 현구시인의 시제목인 ‘검정비둘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구시인은 유년기에는 일본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였지만 해방을 전후해 가세가 기울어 읍사무소, 군청, 농촌지도소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돈과 경제생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던 현구시인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또한 현구시인의 평가에서 여운영선생을 가장 좋아했다는 부분과 가세가 기울면서 기존 부유계층에 대한 불신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가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당시 엘리트계급들은 한번씩 사회주의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이 있었던 시기이고 현구시인이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좌익에 몸담았다면 그들에 의해 살해당하지는 않았을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처음 시도된 현구시인의 작품전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자칫 묻혀버릴수 있는 지역의 위대한 시인이 순수민간단체에서 추진한 행사라는 점과 유가족들의 협조속에 만들어진 작품전이다. 또한 주민들의 참여가 이어진다면 현구시인의 발자취가 새롭게 나타날것이고 영랑선생, 다산선생에 이어 강진의 대표성을 띄는 위대한 작가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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