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팽나무와 선돌이 마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마을기행]팽나무와 선돌이 마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8.27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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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량면 장포마을
▲ 명두산을 배경으로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포마을은 미맥농사 이외에 하우스를 하는 주민이 없어 부유한 마을은 아니었지만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 관공서에 다니거나 의사출신들이 많이 배출됐다.

마을앞까지 바닷물 출렁했으나 지금은 미맥농사 생활

절기상 더위가 지나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처서를 넘겼는데도 막바지 무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낮에 내려쬐는 무더운 날씨 속에 들녘은 그야말로 찜질방을 연상케 했다. 폭염의 열기에 불이 붙은 듯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찾아간 곳은 칠량면 장계리에 위치한 장포마을.

국도23호선을 타고 칠량면소재지를 지나 대구방면으로 3㎞를 달리다 보면 도로좌측으로 장계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다시 우측으로 발길을 돌리면 양 옆의 넓은 들판과 명두산을 배경으로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포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장포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선돌이다. 1.5m 높이의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 역할과 복을 불러 들이는 역할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선돌을 지나 좌측으로 조성되어 있는 마을의 우산각 또한 장포마을의 또 다른 풍경거리. 우산각을 중심으로 200여년 된 팽나무를 비롯해 귀목나무 등 10여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나무들은 우거진 숲속을 연상케 하듯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200여년 된 팽나무를 비롯해 귀목나무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산각 주변은 주민들의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은 지난 2000년도에 주민들이 우산각을 중심으로 공원을 조성해 나가면서 현재는 나무벤치, 테이블 등을 갖춰서 주민들의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발걸음을 옮겨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회관으로 향하는 동안 곳곳에는 태양초와 깨 등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어 주민들의 현재 생활상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마을회관에 다다르자 회관 옆에는 주민 5명이 모여 앉아 말린 깨를 털어내는 작업으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잠시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주민들과 함께 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을에 대해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안정섭(73)씨였다.
 
안 이장은 "마을 주민들이 순후하고 넉넉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오순도순 형제지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며 "일년에 세 차례 이상 마을모임을 갖고 있는 것도 주민들의 정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고 설명했다.
 
장포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김해김씨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아오다 이후 군동면 장산리 대곡에서 이거해 온 연안차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연안 차씨를 비롯해 김해김씨, 경주이씨 등 32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장포마을은 마을 주위의 지형이 포구에 닿는 형국이라 하여 장포(長浦)라 하였다고 한다.
 
이같은 지명은 마을 앞에 포구가 위치해 있었고 그 길이가 마을에서 현재 매자리식당까지 10리에 이를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장포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00여년에 간척사업이 실시되면서 현재 마을 앞으로 펼쳐져 있는 논밭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장포마을은 예전부터 해상에서는 바지락과 같은 어패류와 육상에서는 장계뜰에서 생산되는 미질이 우수한 쌀과 고추가 유명한 마을이었다. 특히 간척지를 논으로 이용함으로써 재배되는 쌀은 높은 맛과 품질을 자랑해왔다.

이러한 지형적인 이점으로 마을주민들은 90%이상이 미맥위주로 생활하면서 현재 간척지를 이용해 재배되는 벼 면적만도 39㏊에 이르고 있다.
 
예부터 장포마을 주민들이 미맥위주로만 생계를 이어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60~70년대 마을은 칠량면 봉황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바지락 주산지였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당시에는 가구당 하루 평균 60㎏정도의 바지락을 채취했을 정도로 수확이 좋았다고 하니 주민들의 소득 또한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사가 밀려들어오고 강진만 일대의 환경변화로 바지락 채취가 어렵게 되었고 현재는 4~5농가만이 강진만 일대에서 석화를 채취하고 있으나 채취량은 한 해 평균 75~150만원의 소득에 그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장포마을 주민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해마다 세 차례 이상 모임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펼쳐가고 있는 모습이다. 유두날을 비롯해 봄과 추석 등을 이용해 주민들은 마을진입로와 바닷길 환경정화 활동, 회관청소, 풀베기 등을 실시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의 단합과 화합을 이어가는 의미와 더불어 항상 깨끗한 마을을 만들고자 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매번 모임에는 어느 누구하나 빠지지 않기 때문에 마을잔치가 일년에 세 번 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환경정화 활동이 끝나면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술과 음식을 나누며 정을 쌓아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마을출신 인물로는 강진읍 동성리에 삼세의원을 개원해 운영하던 김방모씨, 강진삼세의원장을 지낸 김재려씨, 강진경찰서 재무과장을 지낸 김재모씨, 서울지하철공사 이사장을 역임한 김재명씨, 군동·대구면장을 역임한 차병태씨, 현 강진군문화재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인 양광식씨 등이다.

▲ 주민들이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린 깨를 털어내는 작업으로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터뷰 - 장포마을 노인회장 차종선 씨

"자식들 제 역할 하고있으니 큰 행복"

 
밭에 가기 위해 오토바이를 끌고 집 밖으로 나오던 차종선(80) 장포마을 노인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 회장은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보낼 고추와 깨 등을 말리기 위해 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3남4녀를 두고 있는 차 회장은 "내가 직접 지은 곡식들로 자식들이 음식을 해먹을 것을 생각하면 한 해 힘들었던 농사일이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마을에 대해 차 회장은 "우리 마을은 인심 좋기로 소문난 마을"이라며 "마을주민들이 한집 식구같이 살다보니 다툼도 없고 고소, 고발도 없이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고 마을자랑을 했다.
 
앞으로 바람에 대해 차 회장은 "자식들이 각자 맡은 일 모두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며 "인정 넘치고 상부상조하는 마을로 장포마을이 널리 이름을 알리는 것도 하나의 바람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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