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석의 '고향에 띄우는 편지']
[정문석의 '고향에 띄우는 편지']
  • 특집부
  • 승인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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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편지를 보냅니다

글을 시작하며

 

일광(日光)이 좋은 5월에 서늘한 백림 그늘 아래서 내 고향 청자골로 이 편지를 씁니다. 학창 시절 안쓰런 소녀에게 연서를 쓰듯,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타향 잣나무골에서 청자골로 이 편지를 씁니다.

 

강진의 5월은 범대순 시인의 말대로, 다섯가지 푸른빛으로 빛납니다. 하

늘과 물빛, 시와 청자, 푸른 길 사람이 꿈을 꿉니다.

 

여기 내가 정착하고 있는 가평은 삼다삼청(三多三淸 : 水柏, 空淸, 水淸, 心淸) 고장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어디를 둘러보아도 첩첩산중이요, 계곡과 잣나무가 울창합니다. 맑은 물, 맑은 공기, 맑은 마음이 지천으로 있으니 후한 인심이 나기 마련입니다.

 

나는 강원도에서 7년간 살았지만 가평은 경기도에서 강원도보다 더 오지요 심심산골입니다. 언제인가 도하 각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한국에서 제일 공기 좋은 곳으로 가평 명지산이라는 것이 보도됐을 때 내가 말년에 좋은 곳을 선택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요새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고도 너무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한쪽 구석지에 이리떼 먹이 찾듯이 천만명 이상 인구들이 와글시끌 몰려 살고 있으니 소, 개, 돼지, 축생이 아니고서야 어디 사람이 살만한 곳입니까?

 

자연을 극단적으로 밀어내는 서울이라는 인공 구조물 안에서, 민감한 자연물인 사람이 그토록 시달리는 나날의 연속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 사람들은 시멘트 밀림과 매연의 늪에서 날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만 그러는게 아니고 마음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양심과 원칙은 짓눌리고 술수와 변칙이 지배 원리가 되면서 범죄의 늪이 인간을 가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울 사람들의 발길은 늘 바쁘고 뼈골 빠지고 쐐 빠지게 일해도 빚잔치하기 신물 난다고 서울로 몰려드는 추세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강진도 전라도에서 최하위 인구지만 가평도 경기도에서 최하위 인구입니다. 맑은 물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기가 살기 벅찬 모양이지요. 서울에서만 한해 3만명 이상이 주기적으로 암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죽음의 공기를 마시며 오존주의보 아래에서 허둥대다 보면 서울 사람들은 계절의 드나듦이나 자연이 주는 생명력이 얼마나 싱싱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면서도 먹고 살기가 바쁜 사람들은 늘 포기하는 것이고, 좀 있는 졸부들은 시간만 나면 서울을 탈출해서 그림 좋은 곳으로 가서 골프도 치고, 젊고 이쁜 여자와 러브호텔로 가서 사랑도 하고, 물 좋은 계곡 가든에 가서 배부르게 먹고 한잔을 꺾어 온 세상이 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서울에서 우울증과 협심증 심장병 때문에 남모르게 시달렸는데 가평에 와서 잣나무 맑은 공기와 물 때문에 숨 좀 편히 쉬고 아직까지 지옥 가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정신의 공허함의 빈터에 쉼터를 찾고 심심하면 돈도 되지 않는 사삭스런 시도 그적거리고 청자골을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창창한 청년처럼 아직은 건재하다고 보랏빛 연애편지를 쓸 것입니다.

 

앞으로 한 일년간 청자골 고향 사람들에게 어설픈 나의 인생이지만 예술도, 종교도, 농업도, 우정도, 술도, 여자도, 환경도, 기쁨과 눈물도 편지하겠습니다.

 

서신 수신자 대상은 오래전에 작고한 고향 어르신일수도 있고, 생존한 존경하는 선배일수도 있고, 다정한 친구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후배일수도 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초라한 통신 잔치지만 개막의 장을 울립니다.

다음 만날때까지 안녕하십시오.

                        가평 설곡 산방에서   문석.

 

 

정문석 약력

▶1938년 전남 강진출생

▶강진농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 수학

▶월간 ‘한국시’에 ‘무지게 농장’외 2편 당선

▶글밭문학회 동인, 넝쿨문학 동인, 모란촌 동인

▶현재 경기도 가평 거주

▶저서:사랑하는 사람들, 방랑농부, 행복한 나날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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