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성전 경포대의유래
[1]성전 경포대의유래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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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문사고전연구소장>
▲ 양광식 회장

글을 시작하며

잡동사니란 여러가지가 한데 뒤섞인 것을 말하는데 어원의 근거는 공자(552-BC479)의 술이부작, 임방(460-508)의 술이기, 우리나라 안정복(1712-1791)의 잡동산이와 같다.
안정복의 잡동산이는 경서, 사서, 제자문집 등에서 한자로 된 숙어나 성구인 문자를 가려 뽑고 그 지방 특유의 이름난 산물인 명물, 정해진 제도인 도수, 개인이 사사로이 편찬한 역사책과 민간의 전설을 기록한 패설로 이루어 졌다. 여기서는 ‘전인의 학설을 전해 받아 밝히기만 하고 자기의 새로운 학설은 내세우지 않되 참으로 옛 것을 좋아한다‘는 「술의부작」의 본 뜻을 쫓으려 한다. 그래서 국가, 공공, 개인 등이 기록해 둔 자료들을 발췌 후 번역하여 알리되, 어떤 것이든 간에 강진과 관련된 내용들을 위주로 하며 같은 내용이면 최초의 것을 위주로 하려고 한다.
마침 강진신문의 증면에 따른 발전단계로 보아, 모두가 원하는 내용은 아닐지라도 강진에 관한 상식을 업그레이드하는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둔재와 졸필이지만 엮어 보려한다./필자 주

 

월출산의 남쪽에 백제 때부터 자리 잡은 월남 마을이 있고 산의 초입에는 경포대란 간판이 눈에 띈다. 그런 어느 때 누구에 의해서 부르게 됐는지 알려진 적이 없어서 자료를 찾아보니 경포의 언덕에 대한 일의 자취와 산수에 대한 아름다운 모양들을 이감이 남긴「경포대기」와 도갑사 사적지가 있기에 번역하여, 필자의 소견을 덧붙여 의문해소에 일조가 되도록 애써 보았다.

■화개산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넓고 두터우면서도 아득히 오랜 것을 논하자면 오직 경포대에 있는 바위가 아니겠는가? 오호라! 하늘에는 3원인 자미, 태미, 천시원과 28수가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 북극곰 자리를 중심으로 170여개의 별이 에워싸되 천제가 거처한다는 화개산과 연결된 큰 산악인데 다른 이름으로는 월출산이라고도 부른다. 또 북극의 다섯별 가운데 가장 밝은 천황 같은 봉우리의 한 갈래가 남쪽에 나뉘어졌고, 수많은 골짜기들이 앞을 다투는 듯 뻗어 내렸다. 여러 개의 험준하게 쌓인 암벽과 포개어진 바위들은 수 십리를 서로 연결되었는데 마침내 산이 다하고 물이 막힌 즉, 막다른 길에 이르러 더 이상 빠져 나갈 수 없게 된 곳이 「경포대」이다.

■바위에 새긴 「금릉경포대」
경포대의 동쪽 변두리에 넓고도 전망이 탁 트이되 가이없으며 사람의 키로 수십배나 될 크나큰 바위가 골짜기의 벼랑에 버티고 있다. 그래서 4종(10촌)이 되는 아우인 이장흠이 「금릉경포대」라고 다섯자를 크게 써놓았다. 이 일은 아주 오랜 옛날의 1만8년 뒤에야 텅 빈 골짜기에서 처음 듣는 사람의 발자국 즉, 좀처럼 듣기 어려운 훌륭함이요, 또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혼돈한 상태를 깨뜨림이니 종래에 아무도하지 못한 일을 처음으로 해냈다고 할 수가 있다.

■성균박사 정원이감 여덟자
경포대의 중간쯤에 집채만한 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은 용이 서린 듯, 범이 웅크린듯하며 신은 깎아내고 귀(鬼)새긴 듯이 정 남쪽을 향하고 있다. 물살은 빠르게 소용돌이치면서 급하게 흐르는데 마치 높은 절벽에서 곧추 쏟아 내리는 폭포처럼 바위 틈새로 쏟아 내린다. 이 바위에 정남쪽에다 「성균박사 (유교를 잘가르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치게 함) 정원이감, 여덟자 돌을 잘 다루는 기술자를 불러다 크게 새겼다. 이 때에 만물을 만들어 낸 신이 굳게 감춰둔 지역이며 모든 사물은 각각 주인이 있고 또한 시간에도 기대하는 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부터 이 뒤로는 나를 불러 줄때에 「경포대주인」이라 하여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끝을 맺었다.

■글씨 새긴 이
「금릉경포대」라 새긴 이는 원주이씨 28世 이장흠은 자가 이헌 호가 남고이며, 「성균박사 정원이감」이라 새기고 「경포대기를 지은 28세 이감은 자가 치목 호가 계양인데, 1907년에 경의과에 합격하여 성균박사를 지냈고 강진에 관한 수많은 글들을 남겼다.

■맺는말
먼저 금릉경포대는 금릉과 경포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금릉」이란 1172년에 도강현에다 감무라는 관리를 파견하고부터 별도로 부르던 명칭이다. 그 뜻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들판에 위치한 성벽」이고 다른 하나는 초나라의 위왕이 왕의 기운이 있다하여 땅속에다 금덩이를 묻어놓고서 금릉이라 불렀다 하니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아직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경포대」란 어느 곳에 위치한다고만 적었으니 필자의 소견으로는 영풍앞의 「황금들」에서 바라 볼 때 월출산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모습이 백막 공중을 나는 것처럼 보여야 풍년이 들어 수많은 사찰에 공양미를 올릴 수 있다는 전설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물 흐르는 모습이 무명베를 길게 늘어놓은 것처럼 비가 자주와 주어야 하는 소망이 담겨있다. 그런 관동 8경의 하나인 강릉의 경포대는 호수의 물이 거울처럼 맑아서 유래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다음은 화개산과 월출산에 대해서 인데 1636년에 북명사가 지은 도갑사 사적기에 언급이 되었다. 먼저 「화개산」이란 뜻은 임금이나 높은 사람이 사용하던 해 가리개인데 「문수대사」가 처음으로 이 곳에 왔을 때에 하늘의 구름이 항상 산의 꼭대기를 덮고 있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서 부르게 되었다하고 「월출산」은 달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옛날에 지혜와 용맹을 주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모시는 문수대사가 서역의 월지국에서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거주하게 되어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을 종합하면 월지국의 문수동작이 산에서 처음으로 살게 되어 상서로운 구름이 봉우리에 덮어 있는 모습을 보고, 한말이 화개산이니 월출산이니 하게 됐고 1172년부터 부르게 된 금릉의 유래와 비가 내려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무명베를 길게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데서 「경포대」라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후로도 전설, 구전, 기록들을 더 모아서 산 명칭, 봉우리, 골짜기, 사찰지 등을 나누어서 하나씩 정리해서 공기와 물의 중요성을 일깨우되 그 시작은 삼존암의 우물터에서 하되 거기에서는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꽉 채워다가 모든이에게 나누어주어 함께 기쁨누리는 복전이 되도록 이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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