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 만난 임방울과 이화중선
강진에 만난 임방울과 이화중선
  • 특집부 기자
  • 승인 2003.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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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국<강진읍 출신. 전 서강대학 학장. 현재 미국체류>

내가 어렸을 때 1930년을 마지막으로 임방울이 이끄는 협률사가 강진을 자주 찾아왔다. 협률사가 오면 강진은 금세 축제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였다. ‘새나팔’을 부는 사람을 앞세우고 북치는 사람 징치는 사람이 따르고 울긋불긋 요란스런 색채로 단장된 협률사의 기를 대여섯개 들고 읍내를 일주함으로서, 일반에게 공연을 광고하였다. 기를 들고 간 역할은 어린소년들의 몫이 되였는데 기를 들고 간 댓가로 공연장 입장권 한 장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 기를 들고 가려고 경쟁이 심하였다.

다음은 공연장을 짓는 것인데, 그 장소로는 경찰서 앞이 안성맞춤으로 선택되었다 ‘차일’은 협률사가 가지고 다녔고, 관객석은 빌려온 ‘덕석’을 깔아서 마련하였다. 무대는 손재주 있는 협률사 직원이 간단히 건설하였다. 저녁 공연 때 무대분위기를 돋구는데에는 ‘아세지린’까스를 이용한 ‘칸테라’가 이용 되였는데, 이것이 아늑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품겨주었다.

이런 초라한 공연장내에서 전개는 판소리는 천하일품이였다. 임방울은 언제나 흰 무명베의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고, 이하중선은 채색이 잘 조화된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가 일반이 좋아하는 가곡 이였고, 관중의 판소리에 대한 교양도 높아 ‘취임새’가 적절한때 터져 나옴으로써 단상단하 호흡이 맞은 황홀한 공연이 되였다.

다음날에는 강진의 한량들이 이 두사람을 불러 놓고 점심을 먹으며 사적으로 판소리를 즐겼다. 소위 ‘텃세’를 받아낸 행위인데, 한량들의 비위를 건드리면 다음공연에 차질을 겪기 때문에 ‘울고겨자먹기’로 응한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광대라 천시한데 반발하여 나주 송정리 출신인 임방울은 호적을 북한으로 전적하고 만 것이다. 우리민족의 애환을 담은 판소리 공연도 1930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총독부의 한국 고유문화민족의 말살정책의 압박으로 고사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 임방울이 오랜만에 실로 15년만에 강진에 나타났다. 다만 이하중선을 동반하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보통학교 교실 세 개를 터서 공연장이 마련 되였다. 임방울의 명성에 이끌려온 관중으로 장내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임방울은 그동안 굶주려서 그랬던지 안색이 좋지 않았고 건강도 좋지 않아보였다. 막 노래가 시작된 시점에서 갑자기 정전이 되였다. 꺼진 마이크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가엾은 소리는 우리 귀에 익숙한 웅장한 소리가 아니여서 실망이 컸다.

그러든차에 전기가 다시 들어와서 마이크가 다시 가동되였다. 거기서 흘러나온 소리는 웅장하고 섬세하고 높고 낮은 음률이 변화무쌍 하는 신선의 곡조였다. 임방울 같은 소리는 몇백년 에 하나 올까 말까한다고들 한다. 임방울의 경지에 가까이 갈만한 남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여창에는 이화중선의 뒤를 이어받아 김소희, 성창순, 안숙선이 줄줄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일본 광복 후 미군정부 백부님 회갑연에서 임방울의 육성노래를 들은적이 있다.

일제 때 순천군수를 지낸바있는 성정수씨가 임방울과 동도하여 축연에 참석하였을 때였다. 성정수씨는 그 당시 아들이 미군정부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어 그 위세가 군수시절 못지않게 당당하였다. 성정수씨와 임방울은 서로 번갈아 북을 잡고 한편의 노래가 끝나면 다른 편이 곧이어 받았다. 여기서 광대와 한량의 판소리를 주고받고 하는 멋진 연기의 극치를 볼 수 있었다. 공연무대에서 볼 수 없는 정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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