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 성전면 랑동마을
마을기행 성전면 랑동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3.05.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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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는 듯한 무더위는 30도를 육박하고 어느새 계절은 봄의 끝자락을 지나 여름을 향해가고 있었다. 보리가 익어가는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파도를 타고 분주한 농부의 하루는 오늘도 짧기만 하다.

강진읍에서 출발해 새로 개통된 4차선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다 성전면 이정표를 따라 급커브를 돌아 나오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마을이 성전면 랑동마을이다. 마을입구에 수백년은 족히 먹어 보이는 아름드리 팽나무와 소나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랑동마을은 풍수지리학상 호랑이 형국으로 마을 입구가 꼬리에 해당돼 호랑이가 꼬리를 움직이게 되면 마을에 큰 피해가 온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팽나무와 소나무들이 심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면소재지를 거쳐 작천으로 흘러가는 금강천이 마을앞쪽으로 흘러 큰 비가 오면 고기가 마을로 올라왔기 때문에 어랑동(漁浪洞)이라고 불리다가 랑동으로 변경되었다. 본래 마을은 현재의 위치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농경지가 적고 교통이 불편해 일제시대 현 마을위치로 차차 옮겨와 마을을 형성했다.
마을에 처음 입촌한 성씨는 청주한씨라고 하나 현재 마을에 사는 주민은 없고 다음으로 진주정씨, 여산송씨등이 이거해와 현재 46호 80여명의 주민들이 논농사를 바탕으로 생활하고 있다.

랑동마을에는 원님이 지나가다가 이곳에 있는 샘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해 불리워진 마음동, 마을의 서북쪽으로 뻗어 있으며 성전면과 해남 계곡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일제시대 성전면 일대의 측량기점이 되었다는 깃대봉, 깃대봉에 있는 바위로 모형이 범의 머리같이 생겼다 하여 이르는 범바우, 마을입구에 돌이 많아 불리운 독배기, 원님이 행차하다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원님바우, 옛날 중이 바위위에서 이를 잡으면서 졸다가 떨어져 죽었다 하여 불리워진 마을입구에 있는 중바우, 도림리 도림으로 가는 고개인 잿등고개, 깃대봉에 있는 골짜기로 현 마을로 이주하기 전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대사골, 동북쟁이골등이 마을 곳곳에 불리우고 있다.

랑동마을에는 원님과 관련되는 지명과 유물들이 많다. 원님바우, 마음동을 비롯해 강진현감을 지낸 유석희의 선정비가 있으며 원님이 말에서 내렸다는 하마비가 마을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송완섭(77)씨는 “예전에 원님이 새로 부임할 때 풀치재를 넘어 랑동마을을 거쳐 도림리로 가는 길을 이용했었다”며 “원님이 행차시 우리 마을에서 멈춰 말에게 물을 먹이고 원님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다”고 말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영록이장은 “새벽4시가 되면 벌써 주민들이 일터로 나갈 정도로 근면하고 부지런한 마을이다”며 “낭비하지 않고 근검절약하지만 정말 필요한 일에는 니것내것 가리지 않고 서로 돕고 있다”고 마을 자랑을 했다. 정후기(62)씨는 “50년대 이전 마을에 지소, 우체국, 도정공장등이 마을에 있어 면에서는 가장 큰 마을중의 하나였다”며 “그 당시 300여명이 넘는 마을주민 중 50여명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어 공무원이 가장 많이 사는 마을이었다”고 회상했다.

마을을 따라 올라가니 마을 중앙에 폭 7m정도 되는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목중앙에는 돌로 쌓아진 둑위로 만개한 꽃나무들이 서 있어 다른 마을에서는 볼수 없는 독특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김이장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 주민들은 연방죽이라고 부르고 있다”며 “예전에는 물이 깨끗해 연방죽에서 물고기도 잡고 했으나 현재는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랑동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대소사에 있어서 내일처럼 나서 해결해 왔다. 3년전 마을회관을 세울 당시 건립자금이 부족해 마을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두고 출향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수천만원의 기금으로 현재의 마을회관을 지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은 회관에서 서로의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은 정겹기 그지 없다. 

최근 랑동마을에는 경사스런 일이 있었다. 지난 4일 강진중학교(현 성전중학교) 설립자인 고 정종실선생의 공적비가 마을에 있는 진주정씨 제각앞에 세워졌다. 이날 윤동환군수등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공적비 제막식이 있었다. 고 정종실선생은 지역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시국관과 민족 독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교육에 앞장섰다. 고 정종실선생의 동생 정창기(71)씨는 “강진중학교로 인가를 받던 46년도에 중학교가 면소재지에 있었던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다”며 “관내 지역은 물론 인근 영암과 해남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와 지역 교육에 이바지했었다”고 말했다.

랑동마을 출신으로는 목포·장흥지검 검사를 역임하고 현재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덕기씨, 수양초등학교 교감을 지냈던 박정식씨, 전북대학교 공대교수로 근무했던 정두형씨, 서독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김성실씨, 도청 공영개발사업단장을 지냈던 정갑주씨, 광주시청 사무관을 역임한 송장욱씨, 군법무관을 거쳐 서울에서 변호사로 있는 정갑선씨, 담양중학교 교장으로 퇴직한 김정록씨, 수원지검에서 검사로 있는 정희창씨, 크라운제과 부사장을 맡고 있는 김무남씨, 나주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김광식씨, 군청 사회복지과에 근무하는 동영국씨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인터뷰-손귀심씨
 
뙤약볕이 내려쬐는 오후 마당에서 모내기를 위해 못자리를 준비하고 있던 손귀심(여·67)씨를 만났다. 강진읍 장전마을에서 시집와 45년째 생활하고 있다는 손씨는 “이번 주말에 모내기를 할 요량으로 못자리를 손보고 있다”며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올해는 팔일모를 심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손씨는 “1천800여평 논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모판 80여개가 필요하다”며 “팔일모를 심는 흙가격이 비싸 한상자에 3천원씩 26상자를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3남2녀를 두고 있는 손씨는 “자식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어 한해 농사지어 식량으로 서너가마 정도 보내주고 있다”며 “자식들이 쌀값이라고 용돈을 보낸다고 해도 우리는 먹고 살만하니 절대 보내지 말라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손씨는 “한해 농사로 우리 가족 식량하고 기계대여료 내고 융자금 갚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지만 우리 내외 용돈 정도는 벌고 있다”고 덧붙였다.

손씨는 “시집올 당시에는 산에서 나무도 하고 추운 겨울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며 “집집마다 지하수가 개발되고 전기가 들어오면서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말했다.    
마을자랑을 부탁하자 손씨는 “정도 많고 화목해 인근에서 모범부락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을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도우며 사는 마을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남편 정학귀(69)씨가 몇해전 마루에서 떨어져 거동이 불편해 거의 모든 농삿일을 혼자 하고 있다는 손씨는 “전에는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어 힘들어도 논에서 물꼬도 봐주고 조금씩 농사일을 도와 주었다”며 “요즘은 병이 깊어져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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