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는 엄골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탐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엄골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탐진강이 흐르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6.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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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동면 양산마을

▲ 양산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을잔치가 자주 열리는 것이다. 20여명의 주민들이 해마다 열리는 잔치를 통해 화합과 단합을 이루며 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다.
마을화합 주민잔치 자주 열어

황금빛 물결을 이룬 들녘은 수확을 앞둔 보리가 남실남실 바람에 춤을 춘다. 보리 수확을 끝마친 들녘은 모내기를 준비하는 주민들의 손길로 분주한 모습이다. 일찍이 모내기를 끝낸 논에는 초록물결을 이룬 어린모들이 한낮의 햇볕을 여린 몸으로 이겨내며 풍년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하고 있다.
 
본격적인 영농철을 맞아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농촌의 들녘을 따라 발길을 옮긴 곳은 군동면 양산마을. 군동면소재지에서 삼신리 방면으로 향하는 군도를 따라 1㎞를 달리다 보면 석교다리가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좌측방면으로 덕천마을을 지나 2㎞를 더 달리다 보면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산마을을 볼 수 있다.
 
예부터 양산마을은 마을 뒷산 엄골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탐진강이 흐르고 있어 풍수지리학 상 배산임수가 잘 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지명 또한 풍수지리에 능한 스님이 마을 앞 정자나무 밑에서 쉬어 가면서 '산세가 좋아 너그럽고 슬기로운 인물이 많을 터이구나'라는 설로 인해 '양산(良山)'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의 형성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으로 인근 덕천마을에 속했으나 지난 1900여년에 분리되면서 현재는 양산마을로 행정편제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는 평해 오씨와 능주 김씨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현재 마을에는 해남 윤씨, 해주 오씨, 김해 김씨 등 14가구 2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 양산마을은 지난 1990년대까지 모든 영농이 품앗이 형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인구감소와 영농기계 현대화 등으로 이유로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마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마을회관을 찾았지만 바쁜 영농철 탓인지 회관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마을회관 뒤로 이어지는 고졸한 길목을 따라 다시 발길을 옮겼다. 때마침 모내기 작업을 위해 집을 나서고 있는 주민 윤재준(82)씨를 만날 수 있었다.
 
마을에 대해 윤씨는 "주민들이 성품이 온순하고 인심이 후해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며 "예부터 영농철 시기에는 주민들이 모내기, 보리 베기, 벼 베기 등을 함께하며 모든 영농을 품앗이로 이루어 왔다"고 말했다.
 
양산마을의 경작지를 살펴보면 벼 재배면적은 20㏊에 이르는 반면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경작지는 2㏊에 불과했다. 이는 마을의 지형적 여건상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중산간 지대에 따른 것으로 밭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경작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산마을은 예부터 벼 재배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벼농사가 주를 이루면서 마을주민들은 영농비 절감과 일손부족 해결을 위해 지난 1990년대까지 모든 영농을 품앗이 형식으로 이루어왔다. 당시 이러한 생활은 주민들의 소득향상은 물론 화합과 단합을 도모하는 구심점 역할이 되면서 인근 마을에까지 전파될 정도로 양산마을의 큰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지난 2000년대에 들어 마을주민들의 노령화와 인구감소, 영농의 기계화 등의 이유로 점점 미약해지는 실정이 되면서 현재는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최영만(55)씨가 주민들의 일손을 도와가며 모내기 준비를 함께 이어갈 뿐이었다. 
 
예부터 마을주민들은 지난 1950년부터 식수난과 농업용수 해결을 위해 수차례 관정사업을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를 거듭했다. 이 때문에 밭작물이나 비닐하우스와 같은 시설물 재배에도 어려움이 따르고 있었다.  
 
▲ 마을회관은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하지만 아랫마을에 위치한 아랫샘은 1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물이 마르지 않고 현재까지도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계절에 따라 물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이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이곳에 과일이나 막걸리, 물 등을 넣어 음식물을 보관했고 겨울에는 물이 따뜻하기 때문에 샘물을 이용해 빨래를 해오고 있다.
 
양산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을잔치가 자주 열리는 것이다. 양산마을은 1년에 4~5번 정도 마을잔치를 갖는다. 특히 설과 추석명절을 비롯해 영농철, 농한기 등을 통해 화합과 단합을 다지는 음식잔치를 마련한다. 매번 잔치가 열리는 날이면 마을부녀회에서 음식과 술 장만에 나서고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마을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고 있다.
 
마을출신 인물로는 여천시청 과장을 역임한 오경훈씨, 금릉중학교 교사를 지낸 오경복씨, 조달청 사무관으로 재직했던 윤영기씨, 수원공고 교감을 지낸 윤인상씨, 서울, 경기도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오혜성씨 등이 있다.

▶인터뷰 - 마을주민 김재도 씨

"세상사는 재미 가득한 마을"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모내기를 위해 모종에 물을 주고 있던 김재도(75)씨를 만날 수 있었다. 김씨는 지난 1월까지 마을이장을 맡아 왔으나 거동이 불편해 이장직을 최영만 씨에게 인계했다. 김씨는 지난 2001년도에 고관절수술을 했으나 후유증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마을 자랑에 대한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올 농사에 대해 김씨는 "모내기에 앞서 모종을 쌓아 놓고 비닐을 덮어 두었는데 내부열이 가했던지 모판 30여개가 고사됐다"며 "지난해는 130개 모판을 심었는데 올해는 기껏 100판이나 될지 모르겠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5,289㎡(1천600평) 규모에 벼농사를 짓고 있다는 김씨는 "거동이 불편해 농사일을 할 수 없다보니 올해 농사 준비도 부인이 직접 나서고 있다"며 "부인은 나이가 들고 관절염이 심해 병원에 다니고 있지만 욕심 때문에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마을에 대해 김씨는 "1950년대까지 100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면서 시끌벅적했던 마을이 현재는 20여명의 주민만이 남아 있는 조용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며 "못살고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마음만은 늘 풍족했고 세상사는 재미가 가득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옛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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