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도암면 강정리 강성마을
마을기행-도암면 강정리 강성마을
  • 김철 기자
  • 승인 2002.07.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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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도암면 강정리 강성마을〈77〉

태풍이 지나간 여파로 소리없이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찾아간 곳은 해남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암면 강성(江城)마을. 강진에서 국도18호선을 따라 해남방향을 향하다 동령마을을 지나 군도를 따라 회룡저수지를 안고 나타나는 강성마을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쌀농사를 위주로 생활하는곳으로 토지의 30%가 문중소유의 전답으로 생활하고 있어 주민들의 대부분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좌,우,뒤편까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곡식을 담는 삼태기의 모습을 닮은 강성마을은 마을앞에 맑은 물이 흘러 강생(江生)으로 불리우다 고산 윤선도선생이 마을앞을 지나다 명칭을 개칭해 강성이라 불리우게 됐다.

현재 25가구 7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강성마을은 해남윤씨가 최초로 입촌해 현재에는 안산김씨등 5개의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강진읍보다 가까운 해남군 옥천장과 계곡면의 이틀장을 이용했던 강성마을주민들은 교통시설의 변화로 차츰 강진생활권에 가까이 놓이게 됐다.

지형을 따라 명명되거나 구전되어 내려오는 마을의 지명은 운치를 더하게 만든다. 식수로 사용하던 강생이샘은 지금도 마르지 않고 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통샘골샘과 새돔발이샘이 있다. 마을뒷쪽에는 길처럼생겼다는 짐마골, 예전 서당터가 있었다는 서당골과 제사를 모셨다는 제각골, 절이 있었다는 마산절, 마을입구에 위치해 마을주민이 벼슬자리에 오르면 솔대를 세웠다는 솔태거리가 마을의 도처에 나누어져 위치해있다. 또 마을의 위쪽에는 해남윤씨의 제각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절로 사용되고 있는 수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매년 대보름날 저녁에는 마을주민들이 모여 농악을 울리고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를 가졌으나 서서히 모습이 사라졌다. 주변산으로 인해 산짐승이 많이 나타나 여우골로 통했던 강성마을은 주변여건으로 인해 큰사건없이 평탄한 역사를 갖춰갔다.

매년 음력9월이 되면 강성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마을에 위치한 4개의 제각에서 시제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해 시제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각 문중이 모이는 시기에는 마을이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인다. 음식장만에 온동네 주민들이 거들어 하나됨을 보여주는 자리가 된다.

마을의 자랑거리는 문화재와 민속자료로 지정된 해남윤씨족보목판과 제각인 추원당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돼있는 족보목판은 총93매로 지난170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고산 윤선도등을 주축으로 여러 문족들이 추원당을 건립하면서 문중결속과 친족유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족보의 특징은 부계친족과 외손도 모두기록하고 있고 자녀들도 출생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목판매수는 총 100여개가 될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93매가 보관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족보형식을 나타내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해 문화적 가치가 높고 내외손이 총망라돼 있어 호남지역의 인물의 기초자료의 역사적의미가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덕종동파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는 전라남도 민속자료 39호인 추원당은 정면5칸과 측면2칸으로 된 단층건물로 1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회관옆에 위치한 거대한 사작나무는 100여년을 훌쩍 넘긴 듯 자태를 뽐내고 있는 가운데 촉촉이 내린 비로 인해 들판은 무척 한가롭고 평온해 보였다. 매섭게 돌풍과 비를 동반했던 태풍도 마을의 휩싸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마을 진입로를 따라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장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제각들이였다. 일반주택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한 죽사동제각과 마을의 끝자락에서 장대한 모습을 나타내는 재봉제각들의 모습으로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마을풍경에 취해 돌아다니다 음식을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마을주민들을 만날수있었다. 김춘심(여 · 64)씨는“윗집에 내일 결혼식이 있어 대사음식 준비하려고 마을주민들이 모였다”며“마을주민들이 이렇게 우애좋게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고 밝혔다. 이야기를 하던 주민들은 “진짜로 신문에 나와야 할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말을했다.

함께 자리하고 있던 윤사례(여 · 69)씨에 대한 칭찬이였다. 95살의 시아버지를 모시고 남편과 함께 살아가는 효부로 올해 어버이날 군수표창을 받은 만큼 효부라는 말이였다.

정들어 사는 사람들은 이웃주민이 친형제보다 낫다는 말이 강정마을에서 유난히 떠오른다. 힘든 농사일로 휴식을 취하며 쉬고 싶은 상태에서도 이웃들의 일이라면 먼저 달려나간다는 강정마을주민들의 모습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히 생각해야할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다.

주민들은 이웃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정(情)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의견차이를 느끼거나 짜증이 나도 막걸리한잔에 상대방을 포용하고 넓게 이해하는 마음은 가슴속 깊이 담아두고 오고 싶었다.

강성마을출신으로는 박사학위를 취득해 명지대학교 도서관장으로 재직중인 윤영길씨, 서울철도청 서기관을 지냈던 윤일하씨, 도암면사무소 재무계장을 지냈던 최영상씨, 행정고시에 합격해 교육공무원으로 재직중인 최정상씨, 해남에서 지리학 연구원장으로 있는 강치중씨, 경남 마산 세무서과장으로 재직중인 윤재학씨, 순천 경찰서에 근무하는 윤재규씨, 서울 동대문구에서 삼락한의원을 경영하는 윤삼하씨, 광주 전일상사를 경영하는 윤영식씨등이 이마을출신이다.




태풍의 피해로 넘어진 고추나무를 가지고와 집에서 다듬고 있던 윤삼식(61)씨와 부인 오종숙(58)씨를 만났다. 윤씨는“태풍이 큰피해를 가지고 올것같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큰피해를 주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고 말했다. 태풍의 피해로 윤씨부부는 집앞에 위치한 300여평의 고추밭에서 50주가 넘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2남1녀의 자식을 키우고 있다는 윤씨는 “예전에는 강성마을은 윤씨의 자자일촌하는 곳이다”며“문중 논이 많아 어려움 없는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농사에 대해 묻자 윤씨는“올해는 보리작황이 좋지못하다”며“보리를 잘 갈아야 벼도 잘된다는데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또 윤씨는“예전에 비해 대부분의 일을 기계로 일을 하게돼 수월해졌으나 정부수매도 줄어드는 상태에서 형제들간에 나눠먹을 생각으로 농사를 짓게된다”고 강조했다.

마을자랑을 부탁하자 윤씨는“마을에 대사가 있으면 너나 할것없이 모두 나서서 도와주는 정이 있다”며“음식을 나눠주며 부락회관에 모여 서로를 축하해주는 것이 예전이나 변함없다”고 밝혔다. 윤씨는“강성마을은 윤씨성이 출발한곳”이라며“마을에 문화
재로 지정된곳이 있을정도로 유서깊고 유명한곳이다”고 말했다.

환경농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윤씨는 지난해 토하를 길러 봤지만 황소개구리로 피해를 입었다. 윤씨는“다른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마을에는 3~4명이 살고있다”며“젊은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것은 먹고 살만한 마을아니냐”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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