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옛 마을들
강진의 옛 마을들
  • 강진신문 기자
  • 승인 2002.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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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식〈문사고전 연구소장〉
우리가 살고 있는 강진군은 현재 300여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들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에 의하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보아야 할 곳들이 있었다.

강진에 전해오는 옛 마을 명칭 가운데 문헌에 나타나는 것을 순서에 따라 적어보자면은 삼국사기, 세종시대월경지역,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신증여지승람, 강진유향좌목등이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에 엮어졌는데 월출산의 동쪽에는 월남(月南)이 있고, 서쪽에는 구림(鳩林)이 있다하고, 세종시대(1419-1450)월경지역으로는 영암의 남쪽에 강진의 무위동(無爲洞), 월남동(月南洞), 구은촌(仇隱村), 좌곡리(佐谷里), 상곡리(上谷里)가 있다 하고,1454년에 엮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평덕(平德), 수운(水雲), 영가(永可), 산계(山計) 산심(山深), 대곡(大谷), 화구(火口), 칠량(七良), 종옥(種玉), 구계(舊溪), 부원(富元)이 있었고,
148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오산(鰲山), 마점(馬岾), 남원포(南垣浦), 작천(鵲川), 진원(鎭原), 통로(通路), 월남(月南), 고야현(古也峴), 가정(稼亭), 석교(石橋), 금천(錦川), 고알(高謁)이 있었고,1530년에 간행된 신증여지승람에는 송계(松溪), 미포(彌浦), 좌곡(佐谷)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강진에서 작성된 유향좌목(留鄕座目)이 있다. 바다를 통하여 쳐들어 오는 왜구를 막기 위해 전라도 병영을 강진에 설치하기로 1417년 1월 20일에 확정하고 북쪽의 도강현(道康縣)과 남쪽의 탐진현(眈津縣)을 합하여 강진(康津)이라 하고 치소를 탐진현 옛터에 두었었다. 그후 도강현쪽 사람들의 요청으로 1429년에 송계(松溪)로 치소를 옮겼다가 1475년에 탐진현 옛 치소터로 다시 옮겨와 2002년까지 존재해오고 있다.

유향좌목은 1509년 4월 8일부터 1643년 1월 10일까지의 기록인데 그 내용을 읍면별로 고쳐서 기록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강진읍은 부춘(富春), 어을어칠(於乙於七), 이본(耳本), 군동면은 대곡(大谷), 화방(花防), 금천(錦川), 대구면은 석동(石洞), 도암면은 지석(支石), 용산(龍山), 항촌, 율포(栗浦), 강성(江城), 성전면은 월남(月南), 오산(鰲山), 고읍(古邑), 안주(安住), 낭동(浪洞), 금예(金예), 정동(瀞洞), 작천면은 당색(堂索)이며 위치가 의문시되는 당동(堂洞), 환령(丸嶺), 계산(계산)도 있다

위의 마을중에 명칭이 바뀐곳과 알 수 없는 곳으로는 무위동은 죽전이나 월하, 구은촌은 미상, 좌곡은 좌일, 상곡은 미상, 수운은 안지, 영가는 미상(북15리), 산계는 미상(북20리), 산심은미상(서북35리), 종옥은 미상(남50리), 구계는 미상(남37리), 부원은 미상(남15리), 미포는 미상(남30리), 남원포는 원포, 진원은 병영의 역전, 통로는 강진읍 평동, 고야현은 미상(북25리), 가정은 척동, 고알은 미상(북30리), 어을어칠은 장전 이본은 송현, 석동은 수동, 율포는 표장, 정동은 안운, 당색은 상중하당, 당동은 수암, 환령은 종령, 계산은 도암 계산으로 추정해 보았다. 자료와 구전을 그리고 문집, 고문서등을 폭넓게 수집하고 논의를 거쳐서 후세를 위해 밝혀 두어야 할 강진의 지명에 대한 숙제이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월남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구은촌과 상곡리 그리고 향소부곡일때의 영가, 산계, 산심, 종옥, 구계, 부원, 미포, 고야현, 고알등이 어디에 해당이 되는지를 밝혀야 할 과제로 삼아야 되겠다.

또 1509년부터 134년 동안에 기록된‘유향좌목’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조사가 되어 자료화 되어야 하겠다. 그 기록에는 년도, 직위, 성명, 마을명등이 적혀 있어서 마을과 사람들이 살아온 내력을 함께 알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명단만 있고 조직에 대한 유래와 조칙이 없는게 참으로 아쉽다.

이상의 자료에서 보듯이 50여 마을은 1643년전부터 있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기록을 토대로하여 경승지, 인물지, 자원출토지, 생산지등으로 나뉘고 분야별로 조사표를 작성하여 그 나름의 특성을 찾아내어 주민이 참여하고 관청은 조건 없이 지원하고 삶의 보람을 극대화 시켜주어서 마을도 자산이 되게 하는 값진 자료로 활용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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