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활짝… 대문이 없는 마을
마음 활짝… 대문이 없는 마을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4.16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을기행-작천면 퇴동마을

▲ 퇴동마을은 옥토끼가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토동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12가구가 속해 있는 퇴동마을은 어느 집에도 대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양산김씨 자자일촌 마을형성
지금은 여러성씨 정착, 대문없는 마을 전통 그대로 이어가

봄의 풍광을 시샘하듯 거센 바람이 만개한 벚꽃을 온 종일 흔들어댄다. 이를 놀리듯 거리의 벚꽃들은 하얀 꽃눈을 내리며 향춘객들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적시고 있다. 봄이 선물하는 꽃눈이 마냥 반갑기만 한 계절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새하얀 터널을 지나 작천면 퇴동마을로 발길을 향했다. 강진방면에서 작천면소재지를 지나 영암방면으로 10여㎞를 달리다 보면 삼거리 우측으로 갈전리를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표지석을 따라 4㎞를 더 달리다 보면 갈동마을을 지나 좌측방면으로 가옥들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 퇴동마을이다.

▲ 지난 2006년 지어진 마을 우산각은 여름철 마을주민들의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퇴동마을은 작천면의 서북쪽 사문골에 위치해 있는 산간마을로 인근 주민들이 '사문안골'로 부르기도 했다. 이는 마을의 계곡이 월남사로 들어가는 통로 일뿐 아니라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전을 바탕으로 주민들은 마을의 형성시기를 월남사가 폐사된 지난 1656년 이전으로 보고 있다.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양산김씨로 알려지고 있다.  퇴동마을은 마을지형이 남북으로 논밭이 펼쳐지고 개울이 흐르는 산간마을이라 일조량이 부족한 탓에 특수작물 생산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현재까지도 벼농사에 의존한 체 대체작물 생산에 고심을 겪고 있었다.  

마을에 들러 가장 먼저 마을이장을 찾았다. 퇴동마을 이장 이동복(34)씨는 지난 2005년 관내에서는 최연소 이장으로 알려지면서 주위의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이장에 따르면 고령화에 따른 인구감소와 이농현상 등으로 인해 마을내 거주 주민 수는 50% 가까이 줄어든 반면 주민들의 생활부분에 대해서는 지난 2006년부터 마을회관과 우산각 설립, 농로포장, 수로개거 사업 등으로 많은 부분들이 개선되었다고 했다.

▲ 회관에 모여 앉은 주민들이 윷놀이를 즐기며 웃음꽃을 피워내고 있다.
이밖에도 주민들은 지난 2008년 관정사업으로 급수시설이 개선되면서 산간지대에 위치해 있는 지형적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식수난 해결에도 걱정을 덜게 되었다.

이어 마을에 대해 이 이장은 마을의 어느 집에도 대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손꼽았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마을주민들은 양산김씨들이 자자일촌을 이루며 살아왔던 터라 친족관계로 지내온 이들이 구태여 울타리를 치고 대문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70여 년 넘게 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는 주민 김용수(76)씨는 "서로가 친인척 사이이고 정이 두텁다 보니 구태여 담을 치거나 대문을 닫고 살 이유가 없다"며 "예부터 마을에 도둑이 없고 범죄가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마을 내에는 김해김씨, 전주이씨, 천안전씨 등 12가구 19명의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지만 퇴동마을의 대문 없는 집은 마을의 전통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 전남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된 강진 사문안 석조상의 모습이다.
퇴동마을은 '사문안 석조상'이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진 마을이다. 사문안 석조상은 높이122㎝, 폭50㎝, 두께28㎝ 크기로 앞면과 좌·우면에 13개의 귀면(귀신의 얼굴)들이 모습을 띄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석상은 원래 사문안골 월남사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던 탓에 마을 입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후 1943년도에 현 위치에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석상은 도깨비에 대한 민간신앙 요소들과 불교적인 요소들이 복합된 유형물로 판단되면서 지난 1992년 3월 전남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돼 마을의 귀중한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퇴동마을에 이르면 복잡한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을 찾은 동양화 화가 노전 묵창선(69) 화백의 화실모습도 볼 수 있다.

회관 뒷길로 이르는 고졸한 길목을 따라 100여m 떨어진 곳에 2층으로 지어진 양옥집이 노전화백의 전시관이었다. 아담한 양옥집에 갖가지 꽃과 암석들로 조성 된 정원이 마을의 풍광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황해도 연백출신인 노전화백은 지난 1998년 퇴동마을에 노전화실을 지어 정착한 후 서예가인 부인 조은심(65)여사와 함께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 회관 뒷길로 이어진 고졸한 골목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면 노전화백의 전시관을 볼 수 있다.
특히 노전화백 전시관은 지난 2003년과 2008년 한국서화작가 전남지부와 동아국제미술협회 전남지부로 개소되면서  미술 후예 양성과 미술 지도 등 각종 문화예술 활동의 공간으로 명성을 높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 또한 노전전시관이 마을에 운영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 장벽을 쌓지 않고 살아가는 주민들. 예부터 서로를 믿어가며 소박하고 순수함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퇴동마을에는 오늘도 훈훈한 고향의 옛정이 물씬 풍기고 있다.

 


"마을에 젊은 일손 모여들기 바래"

인터뷰 - 퇴동마을 노인회장 전종림 씨

현재 마을 최고령자이자 노인회장직을 맡고 있는 전종림(78)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회장은 전날 인근 야산에서 채취해 온 고사리를 햇볕에 말리기 위해 바구니에 옮기고 있었다.

마을에 대해 전 회장은 "지난 1990년대까지 35호 이상에 100여명 가까이 거주했던 마을이었다"며 "뚜렷한 소득원이 없다보니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이 늘어났고 고령화 등으로 인구감소가 급격히 이루어져 걱정이 태산이다"고 말했다.

이어 전 회장은 "가난한 마을이었어도 주민들의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교육열은 대단히 높았다"며 "농사일이 힘들고 고되더라도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꿋꿋이 버텨 자식들을 뒷바라지 해갔다"고 덧붙였다.

5남1녀를 두고 있는 전 회장은 "서울, 경기도 등지에 거주하는 자식들에게 해마다 두차례씩 쌀과 고추기름, 참깨 등을 보내주고 있다"며 "자식들은 농사일을 그만두고 편히 쉬라고 얘기 하지만 자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그만둘 수가 없다"며 웃으며 말했다.

이어 전 회장은 "농촌마을 주민들의 큰 바람은 마을에 젊은 일손이 모여 들어 인구가 늘어나길 바라는 것이다"며 "인구가 늘어 사람 사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농촌마을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