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들판사이로 강진만을 바라보고 사는 마을
넓은 들판사이로 강진만을 바라보고 사는 마을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2.26 0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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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량면 사부마을

▲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 사이로 넒은 들판과 강진만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들판이 보이는 자리는 지난 1970년대 간척사업 이전까지 전국 각지로 옹기를 실어 나르던 옹기운반선이 정박하는 곳이었다.
한때 옹기구워 돈많았던 곳, 지금은 한적
마을주민들 어촌계 지정 바래

 

절기상 입춘이 지나면서 따뜻한 봄기운이 대지를 감싸고 있다. 봄기운을 맞아 들녘의 새싹들은 파릇한 빛깔을 보이며 생동감이 넘쳐나는 모습이다. 성큼 다가온 봄기운을 맞으며 찾아간 곳은 칠량면 사부마을. 칠량면소재지에서 칠량중학교를 지나 마량방면으로 300여m를 가다보면 우측으로 마을진입로가 나타난다. 마을 진입로를따라 200여m를 더 달리다보면 넓은 들판사이로 강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옥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안을 낀 평야마을로 형성되어 있는 사부마을은 마을 주변에 모래가 풍부하여 불린 지명으로 본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지난 1500년대에 들어 경주정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야산을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주변이 전부 평야와 바다로 둘러있고 야산이 없이 툭 트여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듯 했다.

앞서 말했듯이 사부마을 최초 입향성씨는 경주정씨로 알려지고 있다. 최초 입향조는 정선왕으로 1905년에 장흥군 용산면에서 자신의 아들과 친지들을 데리고 사부마을 주변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자가일촌을 이루며 살아왔다고 한다. 

마을을 형성해 살던 후손들은 야산을 개간하여 밭작물을 재배하고 강진만에서 어패류를 잡아 생계유지의 수단을 삼았다. 특히 인근인 봉황에서 옹기 만드는 것을 배워 옹기를 굽고 이를 판매해 생계를 꾸려 나갔다. 

▲ 새점옹기는 무게나 모양, 빛깔 등에서 우수해 전국각지에 판로가 개척되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본래 사부마을의 지명은 새점이었다. 새점은 인근 봉황마을을 옹점(甕店)이라 부른데 반해 사부는 봉황에서 옹기 만드는 기술을 배워 새로 옹기를 구워 팔았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하지만 지난 1970년대 이후로 마을에서 옹기가 차츰 쇠퇴하면서 다시 옛 마을 지명을 찾아 사부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사부마을은 옹기보다도 소금생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소금중에서도 불에 구운 소금인 화염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과거에는 마을 앞 원장의 절반이상이 화염을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었다고 한다.

사부마을에서 생산된 소금은 칠량 오일시장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후 관내를 비롯해 장흥, 영암, 해남 등 각지로 팔려나갔으나 1950년대 현대식공장에서 소금이 대량 생산되었고 재래식 생산방식으로 인해 경쟁력이 뒤처지면서 1960년대 모두 폐업되었다고 한다. 당시 소금 생산을 위해 사용되던 염전은 지난 1976년 간척사업으로 인해 현재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소금생산이 모습을 감춘 이후에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이 사부옹기, 즉 새점옹기었다.
마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마을회관을 찾았으나 주민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발걸음을 돌려 길을 걷던 중 정연근(65)마을이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에 대해 정 이장은 "사부마을은 1960년대까지 옹기 사업이 전성기를 이루면서 칠량면 내에서도 부촌마을로 유명했다"며 "당시에는 마을에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드물었고 대부분이 옹기를 제작하거나 옹기를 판매하는 업을 주로 삼고 생활했다"고 말했다.

1950대와 1960년대만 해도 강진옹기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시 관내에서는 칠량면 영포와 봉황에서 옹기가 제작되었고 사부마을에서 제작된 옹기도 이 중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부마을을 포함해 봉황리 인근에서 쏟아져 나온 옹기는 옹기전용선에 실려 강진만을 통해 군산·부산·제주도로 팔려 나갔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중국까지도 옹기가 실려 나갔다.
사부마을은 1905년 경주정씨가 설촌한 이래 주로 옹기를 제작, 판매한 소득으로 생계를 꾸려나간 마을이었다. 마을이 가구가 늘어 정식으로 행정편제가 된 것도 이 옹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근 봉황마을에 비해 옹기제작은 뒤늦게 출발했으나 이후 마을 지명도 새점이라 불릴 정도로 새점옹기는 전국 각지에 알려졌고 번성기를 맞았다.

▲ 마을회관에 모여 과일과 음료를 나누던 주민들이 마을발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건배를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당시 새점옹기는 봉황옹기에 비해 무게나 모양, 빛깔 등에서도 우수해 전국각지에 판로가 개척되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옹기를 제작하는 주민 이외에도 옹기를 외지로 판매하는 주민들 또한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 마을에는 옹기를 실어 전국 각지에 옹기를 판매하러 다니던 배가 12척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는 옹기를 제작했던 옹막이 10여군데가 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식생활과 주택공간이 바뀌면서 옹기수요는 점차 줄어 들었고 특히 플라스틱의 등장은 전통옹기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한 전환점이었다. 이로 인해 옹기제작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던 주민들 또한 하나 둘 마을을 떠나게 되었고 1990년대 후반 사부옹기는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현재 사부마을은 칠량면 33개 마을 중에서도 주민 소득이 가장 낮은 빈촌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봉황리 4개 마을 중에서도 유일하게 어촌계로 지정되지 않아 주민들의 생계는 더욱 위협 받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은 마을지원 보조 사업으로 인근 갯벌에 꼬막, 굴, 바지락 양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나 어촌계로 지정되지 않은 시점에서 큰 희망을 갖기는 어려웠다.

정 이장은 "현 시점에서 마을주민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어 마을은 더욱 침체되어 가고 있다"며 "마을주민들의 소득이 향상될 수 있도록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뷰-사부마을 나광열 노인회장

"마을 주민들 생계유지 걱정 갈수록 커져"

사부마을에서 옹기제작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을 당시 옹기를 배에 실어 전국 각지에 판매하러 다녔던 나광열(85)회장을 만났다. 현재 마을에서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나 회장은 마을에서 최고령자이자 새점옹기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새점옹기에 대해 나 회장은 "5톤 크기의 옹기 전용선을 이용해 20세 때부터 60세 중반까지 옹기를 나르던 일을 업으로 삼았다"며 "당시에는 고흥, 여수, 통영, 마산, 제주도 등지까지 사부마을에서 제작된 옹기가 전해졌다"고 말했다.

이어 나 회장은 "당시 옹기전용선은 돛단배였기 때문에 옹기를 운반하기까지는 보통 한달에서 두달 정도가 소요되었다"며 "옹기를 팔고 돌아오면 당시 논 한마지기를 살 수 있었을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마을에 대해 나 회장은 "1960년대 당시에는 칠량오일장이 봉황리 주민들이 없으면 장이 안 설 정도였다"며 "특히 봉황리 주민들 중에서도 사부마을 주민들이 장에 들어서면 돈을 빌리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나 회장은 "부촌이었던 마을은 옹기수요 감소와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현재에 이르러 빈촌마을로 되었다"며 "현 시점에서 주민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지금의 위기를 기회삼아 노력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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