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단이 금방이라도 필듯 꽃봉우리를 머금고
목단이 금방이라도 필듯 꽃봉우리를 머금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10.02.05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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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칠량면 목암마을

▲ 매년 목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산을 뒷 배경으로 목암 마을의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교육열 높아 서당과 야학 발달

한파를 뚫고 꿋꿋하게 새싹을 피우는 보리 이파리들로 인해 겨울들녘이 푸른물결을 이루고 있다.따뜻한 봄날처럼 훈기를 느낄 수 있는 겨울바람을 가로지르며 칠량면 목암마을을 찾았다.

칠량면소재지에서 지방도837호선을 따라 장흥군 관산방면으로 4㎞ 정도를 올라가다보면 좌측으로 3m높이의 마을 표지석을 볼 수 있다. 표지석을 따라 600여m를 더 달리다보면 십여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나지막한 동산을 뒤로 하고 넓게 펼쳐진 평야로 둘러싸인 목암마을을 볼 수 있다.

목암마을은 본래 목단동과 농암으로 나뉘어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지난 1950년부터 두 마을이 합쳐지면서 목단동의 목(牧)자와 농암의 암(岩)자를 따서 목암이라 일컫게 되었다.목단동은 마을 앞 2개의 동산에 목단꽃이 많아 불리게 지명이다.

▲ 마을 회관 앞에 지어진 정자는 여름철 주민들에게 시원한 쉼터가 되어준다.
두 개의 동산중 큰 동산은 활짝 핀 목단꽃이고 작은 동산은 피지 않고 머금은 목단꽃 형상이라고 한다. 현재 큰 동산 일부는 농지정리로 인해 개간되면서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작은 동산은 묘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농암은 본래 용암으로 불려왔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 동쪽에 있는 호암산에 범의 형상을 닮은 형제바위가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범바위가 마을로 내려오면 피해가 올 것이라고 여긴 주민들이 호랑이가 무서워하는 대나무의 죽(竹)자가 넣어 농(籠)으로 이름을 바꾸어 바위가 굴러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목암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해남윤씨 자손들이 농암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이후 전북 남원에서 이거해와 단월리 율변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통천최씨 후손들이 차츰 목암까지 가옥과 농토를 넓히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통천최씨 이외에도 언양김씨, 인천이씨 등 여러 성씨들이 이거해 오면서 목암동에 26가구, 농암에 4가구 등 총 35가구 50여명의 주민들이 오붓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오전 일찍 찾아간 마을은 추운 겨울 날씨만큼이나 한적한 모습이었다.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마을주민들을 쉽게 찾기 어려웠다. 이에 다시 발걸음을 돌려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마을회관 안에는 윤단임(여·82)할머니 등 마을주민 5명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 오랜세월 마을의 상징으로 우뚝 서있는 마을 노거수의 모습이다.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윤 할머니는 "목암은 주민들의 생활력이 강하고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마을로 소문이 자자하다"며 "마을의 규모는 예전보다 크게 줄었지만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변함없다"고 말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목암마을은 예부터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에는 서당과 야학 등이 발달해왔다.
 
마을에 서당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00년. 마을 동쪽에 위치한 목암리골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마을의 서당은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이후 1950년 마을주민 최석신, 송기례, 최찬석씨 집을 중심으로 서당이 다시 개설되면서 1970년대까지 교육이 이루어졌다. 당시 훈장으로는 차보규, 최완규, 조백윤씨가 있었고 최종석, 김재복씨 등 주민 10여명이 한문과 한글공부를 했다고 한다.
 
서당이 다시 개설되면서 야학도 활성화 됐다. 마을주민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최석주씨 집에서 야학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마을 부녀자 30여명이 한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마을회관에 있던 윤달임(82), 정복례(82), 백귀님(82) 할머니도 당시 야학을 통해 한글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정오가 넘어서자 마을회관에는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주민들이 모여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1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회관에 앉아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목암마을은 지난 1974년 관내에서 유일하게 한우 생식 시범마을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시범마을로 선정되면서 마을주민들은 한우에 소죽만 먹이던 사육방법에서 벗어나 생짚과 풀을 썰어 사료와 섞어 먹이는 생식사육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식사육방법은 경비절감, 시간절약 등 당시에는 획기적인 시책으로 지난 1975년 전국평가대회에서 2등을 차지해 농림수산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며 오붓한 정을 나누고 있다.
목암마을의 생식사육이 성공하자 이후 칠량면 지역뿐만 아니라 도내 각지에 생식사육방법이 널리 퍼졌고 선진지 견학을 오는 축산농가도 많았다고 한다. 현재도 마을에는 100여 마리의 한우가 생식사육으로 키워지고 있다.
 
현재 목암마을은 지난 2006년 귀농해 2640㎡(8백여평)의 면적에 4동의 하우스에서 장미를 재배하고 민대기씨가 이장으로 새롭게 선출됐다. 낯선 이방인을 마을의 리더로 받아들이면서 주민들은 민 이장과 함께 농촌사회 발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자 힘을 모으고 있다.


◆인터뷰-목암마을 개발위원장 김재복 씨

"한 평생 함께 한 주민있어 외롭지 않아"
 
마을을 둘러보던 중 운동 삼아 산책을 즐기고 있던 김재복(75)씨를 만났다. 마을에서 70여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는 김씨는 지난 1990년부터 마을 개발위원장을 맡아오고 있다.
 
김씨는 당뇨병을 앓고 있던 중 2년 전부터 갑자기 혈압이 낮아져 매일 산책을 통해 몸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취재 당시에도 거동이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고 이동했던 김씨는 마을 이야기에 대해서는 환한 표정으로 말문을 이어나갔다.
 
마을에 대해 김씨는 "70여년 넘도록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이 변하고 바뀌었지만 마을주민들의 순박한 인심만은 그대로 남아있다"며 "힘든 농사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한평생을 함께 해온 마을주민들이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고 흐뭇해했다.
 
이어 김씨는 "지난해까지 20마지기 정도의 벼농사를 지었으나 올해는 몸이 불편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며 "불편한 몸도 몸이지만 요즘은 농사를 지을 때마다 남는 것이 없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며 금세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앞으로 바람에 대해 김씨는"몸이 불편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보니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며 "마을 주민들 역시 대부분이 고령의 나이지만 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지낼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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