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용이 구름을 타고 내려 앉은 마을
[마을기행]용이 구름을 타고 내려 앉은 마을
  • 김응곤 기자
  • 승인 2009.12.11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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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면 백용마을

▲ 백용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4개반으로 이루어진 탓에 가옥들이 분산되어 있으나 마을주민들은 공동사업 등을 통해 단합심을 높여 가고 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은 잠시나마 한겨울의 추위를 잊게 한다. 햇살이 부서져 은빛으로 출렁이는 도암만의 물결이 눈부시게 펼쳐진 가운데 해안도로를 따라 찾은 곳은 신전면 백용마을.

신전면소재지에서 사초리 방면으로 1㎞를 달리다보면 왼쪽으로 백용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표지석을 따라 500여m를 더 달리다보면 평지에 자리 잡은 백용마을이 나타난다.

백용마을은 타 마을과는 달리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크게 4개 반으로 나누어진다. 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위치한 고운동은 백운처사가 머물다 간 곳이라고 하여 생겨난 지명으로 이곳에서 용이 구름을 타고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백용마을의 1반에 속하기도 하는 이곳은 현재 7가구가 속해있다. 이어 2반으로 불리는 덕동은 고운동 서쪽에 위치한 가장 큰 마을로 10여가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밖에도 1700년대 후반에 생긴 신리는 3반, 회관을 중심으로 동남쪽에 위치한 운동은 4반에 속해 있다.
 

▲ 백용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마을입구는 꿩의 부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소반치라고 불리고 있다.
이밖에도 마을 입구에 위치해 꿩의 부리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소반치와 논정마을 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큰동에도 10여 가구가 속해있다. 이처럼 현재 마을에는 50여호에 100여명 정도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주민 대부분은 벼농사 위주로 생활하고 있고 마을 20여 농가에서는 지난 2006년부터 7㏊면적에 웰빙사업으로 저농약 친환경농법을 실시하고 있다. 이밖에 7농가에서 한우 80여두를 사육하고, 1농가에서 200여평 크기의 하우스 3동에 포도 등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남원양씨로 지난 1650년대 이곳으로 입향 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본래 남원양씨는 전남 함평군 학교면에서 대대로 세거하였으나 남원양씨 21세손인 양순명이 파벌정치에서 화를 당할까 두려워 은거하기 위해 탐진최씨 외가가 있는 강진으로 내려와 백양마을에 입향 했다고 한다.
 
백용마을은 주위에 있는 산 능선이 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지난 1700년대에는 청용으로 불리다가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백용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마을지명이 청용에서 백용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긴 채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옮겨 회관에 들어서자 주민 5명이 따뜻한 방안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던 주민들은 이내 환한 모습으로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마을 소개에 대해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던 김순애(81)할머니는 "예부터 백용은 용이 항상 마을을 감싸 안고 지켜주고 있는 곳"이라며 "마을에 자랑할 만한 유적지나 볼거리는 없지만 용의 마을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을출신 인물들이 사회에서 크게 성공해 출세했다"고 말했다. 
 
▲ 마을주민들이 점심 식사 후 회관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예부터 마을주민들은 타 마을에 비해 교육열이 뛰어났던 반면 지리적 특성상 교육여건은 열악했다. 특히 지난 1963년 당시 마을에 거주하던 양양규(작고)씨 댁에서는 신전면 대벌마을에 거주하는 대훈장 윤사은 선생을 불러와 3년간 자녀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당시 교육을 받았던 자녀 양길현(작고)씨는 조선대 법대와 고려대학원 등을 졸업하고 문학박사를 지냈고 차남 종현씨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광주대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또 차녀 영미씨는 현재 미국 보스턴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예부터 백용마을은 타 마을과는 달리 4개 반으로 나누어진 탓에 가옥들이 회관을 중심으로 멀게는 1㎞가 넘는 곳까지 분산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마을 내에서는 주민들의 단합을 위한 모임과 조직 등의 결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마을 내에는 마을총회 이외에도 위친계(상조계), 관광계, 반계 등의 크고 작은 모임들이 형성되다. 또 독서회와 청농회 등도 마을 주민들의 단합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현재 마을주민들은 지난 2006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공동사업을 통해 벼농사 이외에도 옥수수, 고추, 고구마 등의 밭작물을 공동재배 하면서 주민들의 단결력과 합동심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인터뷰

"농작물 풍년인데 판로가 걱정"
-마을주민 양만규 씨

마을을 둘러보던 중 집 처마 밑에 걸려 있는 메주를 살피고 있던 주민 양만규(69)씨를 만날 수 있었다. 양씨는 2주전에 부인 장광례(68)씨와 함께 메주를 빚었다고 한다. 메주는 지푸라기에 정성스럽게 쌓여진 채 갈라진 틈새 사이로 흰 곰팡이가 피어 아주 잘 빚어진 듯 보였다.
 
메주에 대해 묻자 양씨는 "해매다 빚은 메주로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타지에 나가있는 자녀들에게 보내주고 있다"며 "자녀들이 시골에서 순수하게 재배된 농산물을 좋아하다보니 해마다 챙겨주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양씨는 "고추농사로 2천500주 정도를 심어 이중 800근 정도를 수확했다"며 "올해는 벼농사도 풍년이고 고추농사도 풍년인데 판로가 좋지 않아 썩 기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에 대해 양씨는 "극심한 이농현상과 젊은층 부족으로 농촌의 모습이 침체되어 가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갈수록 힘들어지는 농촌생활이지만 힘든 시기 일수록 주민들 서로가 지혜를 모아 극복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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