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용맹한 매의 기운 마을에 흐르고
[마을기행]용맹한 매의 기운 마을에 흐르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09.10.01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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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량면 신암마을

▲ 응암산에 사람이 살면 출세한다는 설이 전해져오는 신암마을은 예부터 주민들의 학구열이 높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다.
- 1945년 신평-응암마을이 합해 신암이라 명명... 학자들 많이 배출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코스모스가 각각의 색깔을 뽐내며 도로변을 따라 만개했다. 나날이 황금물결을 이루는 들녘을 따라 칠량면에 위치한 신암마을을 찾았다.

강진읍 방면에서 칠량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10여㎞ 정도를 달리다 보면 좌측으로 천관산자연휴양림을 향하는 지방도 837호선이 나타난다.

이어 지방도를 따라 1.5㎞ 정도를 더 달리다보면 우측방면으로 신암마을을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응암산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신암마을을 볼 수 있다.

신암마을은 지난 1945년 신평마을과 응암마을이 합쳐지면서 마을의 글자를 한자씩 붙여 신암이라는 마을명을 사용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응암산은 매 바위산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산과 마을이 어우러져 매의 형국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회관 앞에는 주민들이 정성스럽게 재배한 들깨, 고추 등을 햇볕에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잠시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나무그늘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으로 보고 있다. 과거 신암마을은 대부분 김해김씨의 주민들로 자가일촌을 이루면서 생활했다.

이어 진주강씨, 경주이씨, 해남윤씨들의 주민들이 마을로 입주하면서 한때 50여호가 넘는 주민들이 생활할 정도로 중규모의 마을을 이뤘다. 하지만 도시로 떠나는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22가구에 4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며 생활하고 있다.
 

▲ 마을주민들이 나무그늘 아래 모여 앉아 토란대를 손질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현재 마을주민들은 35㏊면적에 벼농사를 짓고 생활하며 밭으로 사용되는 농경지가 거의 없는 탓에 논두렁 곳곳에 깨, 토란 등을 심어 재배하고 있다.
 
마을에 대해 자세히 묻자 주민들은 먼저 신암마을의 형국에 대해 얘기를 들려줬다. 예부터 신암마을은 매 형국을 하고 있는 탓에 매의 용맹한 기운이 마을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신암마을에는 매와 관련된 바위 7개가 있는데 이를 칠석바위라고 불렀고 응암산과 마을 곳곳에 위치하고 있던 칠석바위는 각각 매의 입, 발, 발톱, 무릎, 가슴, 목, 먹이를 뜻했다.
 
하지만 농경지 정리 등의 이유로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의 바위가 없어졌고 응암산 중턱에 매의 입모양을 하고 있는 매 바위와 주민 강병채씨 집 인근의 바위 3기만 남아있다.

또 마을에서 남쪽으로 500여m 떨어진 안오가리보에는 비둘기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가 있어 이를 매의 먹이라고 불렀으나 30여년전 이 또한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매가 먹이를 먹지 못하여 매의 기운이 없어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신암마을은 강진읍에서도 10㎞정도 떨어져 있고 면소재지에서도 비교적 멀리 위치해 있는 열악한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의사, 교수, 변호사, 과학연구원 등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
 
마을주민들은 그 이유를 1900년대부터 마을에 자리하고 있던 교육기관을 꼽았다. 1900년대 마을회관을 서당으로 이용해 마을주민이었던 차보규, 김원엽씨가 훈장을 맡아 마을주민들에게 한문과 한글을 위주로 예절교육을 실시했다.

또 1950년대에는 주민들 스스로가 마을 내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도 실시하는 등 마을에 자리 잡은 교육환경들이 인재육성에 밑바탕이 됐다.
 
주민 이한주(64)씨는 "마을에는 300년 이상 된 참빛나무와 응암샘이 아직도 남아 있다"며 "특히 응암샘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할 만큼 물맛이 좋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이씨와 함께 마을회관에서 5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참빛나무와 응암샘을 보기위해 발길을 옮겼다.
 
참빛나무는 예전 만덕들에 자리 잡은 만덕사 스님이 마을의 풍년과 흉년을 가리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봄에 잎이 무성하면 풍년이 들고 벌레가 많거나 여름에 낙엽이 지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 신암마을의 참빛나무는 잎사귀의 풍성함으로 마을의 풍흉년을 알리고 있어 시절나무라고도 불린다.
또 나무아래 응암샘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계절에 따라 물의 온도가 다르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이곳에 과일이나 막걸리, 물 등을 넣어 음식물을 보관했고, 겨울에는 물이 따뜻하기 때문에 샘물을 이용해 빨래를 해왔다.
 
예전의 응암샘은 신비한 샘물 탓에 만덕사 스님들은 이곳 샘물을 정한수로 사용했고 이후 소문이 퍼지면서 인근마을에서 샘물을 몰래 가져가려는 사람들로 인해 마을주민들은 밤·낮으로 순번을 정해 샘을 지켰다고 한다.
 
마을출신 인물로는 강진세무서장을 역임한 강병완씨, 사법고시합격 후 변호사를 재임한 강병호씨, 광주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한 최춘씨, 감사원 감사관을 역임한 김상곤씨, 과학기술원 연구원을 역임한 최길주씨, 농촌지도소장을 역임한 강사원씨, 박종식씨, 전남대 의대교수를 역임한 강삼석씨, 강형근씨, 목포서부초 교장을 역임한 명종규씨 등이 있다.


"나락값 좋지 않을까 걱정"
- 신암마을 노인회장 강사원 씨

마을을 둘러보던 중 배추와 무 밭에서 솎음 작업을 하고 있는 강사원(72)씨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부터 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강씨는 농촌지도소에서 28년 동안 근무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에게 다양한 농사정보들을 조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농사에 대해 강씨는"지난해와 비슷하게 올해 농사도 풍년을 이루었다"며 "마을주민들이 구슬땀을 흘린 노력으로 좋은 결실을 맺었으나 올해는 나락값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강씨는 "70여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이 변하고 바뀌었지만 마을주민들의 순박한 인심만은 그대로 남아있다"며 "힘든 농사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한평생을 함께 해온 마을주민들이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고 흐뭇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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