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장승·남생이 바위 전설 지금도 전해지고
[마을기행]장승·남생이 바위 전설 지금도 전해지고
  • 김응곤 기자
  • 승인 2009.07.01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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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량면 중흥마을

▲ 500여년전 탐진최씨가 입촌해 오랜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중흥마을은 24가구 50여명의 주민들이 벼농사 위주로 생활하며 거주하고 있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숨 막힐 듯한 열기를 내뿜는 한 여름 날씨는 한 뼘의 나무그늘을 더욱 그립게 만든다. 온통 초록물결을 이룬 들녘 속에서 풍년을 바라는 농민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찾아간 곳은 칠량면 중흥마을. 칠량면 소재지에서 국도 23호선을 타고 마량방면으로 3㎞ 정도를 가다보면 장계리 입구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향해 학동마을을 지나 1.5㎞를 지나면 우측에 위치한 중흥마을을 볼 수 있다.

중흥마을은 1938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중흥으로 불리게 되었고 예전에는 마을 후등이 소의 멍에와 같은 형국이라하여 가재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중흥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맨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마을 진입로 양 옆에 세워진 장승 4기였다. 장승 4기는 1m에서 1m50㎝ 높이의 작은 형태들이었고 얼굴표정도 웃는 얼굴을 띄어 친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 마을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국수를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마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회관에는 마을주민 6명이 모여 앉아 막 삶은 국수를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중흥마을의 역사는 1500년대로 거슬어 올라간다. 중흥마을은 탐진최씨가 제일 먼저 입촌했다. 다음으로 상주주씨가 장흥군 용산에서 이거해 입촌했고, 전주최씨, 연안차씨 등이 입촌했다.

현재 마을에는 김해김씨, 남양홍씨, 평산신씨등 24가구 50여명의 주민들이 대부분 벼농사 위주로 생활하며 거주하고 있다.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입구에 세워진 장승에 대해 물어봤다.
 
마을주민 최광철(60)씨는 "장승은 중흥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며 "1900년도 초반까지 마을주변에 100여기가 넘는 장승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마을입구 양옆에 세워진 4기가 전부이다"고 말했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30여년 전에 세워있던 장승이 낡아지면서 지난 1월 마을주민 최인옥씨(68)와 마을청년회 회원들이 힘을 모아 이틀간 작업 끝에 1m80㎝ 크기의 장승4기를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 중흥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장승들이 마을입구 양 옆에 세워져 있다.
중흥마을 장승은 밤나무만을 사용하며 끌과 대패로 나무를 깎아내 얼굴을 만들고 먹물을 칠해 모습을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마을주민들은 장승에 대해 제사를 정성스럽게 지내기 때문에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마을주민들이 죽거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퍼질때도 마을에는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장승 옆에 있는 남생이바위도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장승을 지나 바로 오른편에 바위 하나가 놓여있는데 생긴 모습이 남생이 같다하여 남생이 바위라고 부른다.

남생이 바위는 머리부위가 옆 마을인 율변 마을을 향해있고 꼬리부분은 중흥마을 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 생긴 모습이 남생이와 같다하여 마을주민들이 남생이바위라고 부른다.
중흥마을에는 남생이 바위에 대해 재미있는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예부터 남생이가 율변쪽의 산물을 먹고 중흥으로 배설한다고 하여 율변마을은 항상 기가 쇠퇴하고 중흥마을은 항상 흥했다고 한다.

중흥마을이 항상 흥한 것이 배가 아팠던 율변마을의 한 장수가 남생이 바위 방향을 반대로 돌려놓았으나 얼마 후 갑자기 배가 아프고 기력이 쇠퇴해지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 얘기를 들은 한 무속인이 장수를 찾아가 바위 방향을 다시 돌려놓아야 된다고 말했다. 장수는 다시 바위를 돌려놓자 바로 병이 나았고 후로 율변마을 주민들이 남생이 바위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중흥마을에는 마을 주민들을 지켜주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마을회관 옆에 있는 당산나무이다. 마을 당산나무는 400여년 된 팽나무 7그루가 20여m 높이로 나란히 줄을 이루며 울창한 숲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사당나무 아래는 돌계단이 세 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으로 올라 갈수록 시원하고 평온하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면 자연스레 아래층에는 어린 아이들이 앉았고 중간에는 중·장년층이, 맨 위층에는 마을의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휴식을 즐겼다고 한다.

또 마을주민들은 예부터 사당나무에 마을 어르신들이 있을 경우 더욱 겸손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 모셨다고 한다.
 
중흥마을 주민들은 매년 대보름 행사 때 마을의 안녕과 수호, 풍농을 기원하며 장승과 당산나무, 남생이바위에 제사를 올리는 당산제 의식을 올리고 있다.

또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속의식을 계승하고 미풍양속을 지키며 화합과 단결심을 갖고 살아오고 있었다.
 
마을인물로는 칠량 농협장을 역임한 황보춘실씨, 대전지방법원 검사를 역임한 차복동씨, 죽세품 기술이 뛰어난 손구태, 양상익씨, 서울에서 화장품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김국남씨,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역도종목에 참가한 최동길씨 등이 있다. 

"주민들 함께 제사의식 올리는 전통 큰 자랑"

-중흥마을 장승장인 최인옥씨

중흥마을의 장승을 만들어 오고 있는 최인옥씨(68)를 만났다. 최씨는 젊은시절 목수 생활을 바탕으로 손기술이 뛰어나 마을의 장승을 만들어 오고 있었다.

최씨는 젊은시절 독학으로 서예공부를 했고 현재까지 서예활동을 해오면서 서울문화협회 공모전에서 특선 3회, 입상 4회를 수상한 경력도 있다.
 
최씨는"지난 1972년에 만들었던 장승4기가 낡아서 올 초에 장승4기를 새로 제작하였다"며 "장승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항상 정성을 다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씨는"50년째 풍수지리학 공부를 하며 마을의 풍수지리에 맞도록 수십 기의 묏자리를 봐주고 이장해 주었다"며 "현재도 순천, 보성, 부산, 제주 등 외지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요즘 생활에 대해 최씨는"나이가 들다보니 요즘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아 걱정이 많다"며 "늙은 노모를 모시고 있는데 노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할까봐 큰 걱정이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에 대해 최씨는 " 주민모두가 단합하고 협동해 제사의식을 올리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며 "마을을 지켜주는 벅수로 모두 무병장수하고 화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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