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처럼 번성했던 성전의 명동마을
서울 명동처럼 번성했던 성전의 명동마을
  • 장정안 기자
  • 승인 2009.02.18 15: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을기행]-성전면 명동마을
▲ 한때 300여명의 마을사람이 살면서 번창했었던 명동마을은 마을 뒤로 일봉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고 마을 북쪽으로는 토질이 좋은 농토들이 펼쳐져 있는 전원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수려한 경관 자랑 전원생활 최적지

오랜만에 내리는 비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 들녘의 새싹들의 파릇한 빛깔은 생동감이 넘쳐난다. 생명력이 꿈틀대는 대지를 가로지르며 찾아간 곳은 성전면 명산리에 위치한 명동마을이다. 명동마을은 강진읍에서 송현마을을 지나 3㎞를 더 가면 우측으로 나타난다.
 
마을입구 좌측에는 3m정도 높이의 표지석이 있어 명동마을을 알려주고 있다. 명동마을은 입구에서 500m를 더 들어가야 한다. 시멘트로 포장된 마을길을 따라 맨 처음 찾아간 곳은 마을 회관이다.

마을회관은 항상 마을아낙들이 모여앉아 음식을 나누거나 간단한 놀이를 즐기는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이날도 명동마을 회관에는 10명 남짓한 많은 마을아낙들이 회관에 모여앉아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명동마을 회관이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회관에 들어서면서 인사말을 건네자 마을주민들은 객지에서 자식이 온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 아주머니는 "총각이 와서 좋아라 했는데 카메라를 들고 오니 무섭네"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명동마을을 처음 방문한 것 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아주머니들과는 마치 한동네 사람들처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명동마을 주민들의 모나지 않는 순박함과 넉넉한 인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을 회관에서 아주머니들에게 마을에 대해 물었다. 마을 주민들은 "서울에 명동이 제일 번화가이듯이 명동마을도 예전에는 성전 면에서도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던 마을"이라며 "예전에는 넓은 들이 많다는 의미로 번들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에 농사를 지어 미래 광명을 이루자는 의미로 명동(明洞)이라고 마을이름을 바꾸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마을주민들은 "예전에는 물이 부족해 '만주벌판'이라고도 불렀지만 지금은 많이 개선되어졌다"며 "하지만 요즘같이 비가 안오면 농사짓기가 힘이 부칠 것"이라고 걱정했다.
 
또 마을주민들은 간식으로 나눠먹을 귤을 건네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보다는 직접 돌아보면 마을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며 "마을의 제일 큰 어른인 김재율씨에게 찾아가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명동마을은 1400년대에 청주김씨들이 가장 먼저 입촌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명동마을과 옆 마을인 당산마을을 청주김씨 문중인들이 자자일촌 하면서 살아와 친형제 만큼이나 가깝게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청주김씨 이후 한양조씨, 원주 이씨, 김해김씨 등의 문중들이 이거해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마을회관을 나와 마을안길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 안길은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집집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어떤 집은 대문이 아예 없는 곳도 있었다.

▲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을 안길을 지나 찾아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생각되는 언덕배기였다.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마을은 전원생활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일 정도로 경관이 수려했다.

마을 곳곳에 우뚝 솟은 고목나무들과 세월이 느껴지는 각양각색의 지붕들이 한데 어우려져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했다.
 
이어 찾아간 곳은 마을 동쪽 진등에 있는 해남윤씨 선산의 고인돌 무덤이었다. 그곳에는 2개의 길다란 모양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고인돌무덤에는 마을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전에 이 마을에 살던 장사가 고인돌을 일자로 세워놓자 옆 마을 아낙들이 바람을 피우게 되었고 바람을 막기 위해 돌을 다시 지금의 모습처럼 눕혀놓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시 마을 안길로 향했다. 마을에는 얼마 전까지는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빈집들이 많았다. 사람이 살지 않은 탓에 곳곳이 허물어진 곳도 많았고 사람들이 있어야 할 마당에는 누군가가 풀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닭들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국의 농촌의 공통적인 문제인 인구유출이 한때 300여명의 인구수를 자랑했던 명동마을에도 어김없이 찾아 온 것을 확인해 마음 한켠이 씁쓸했다.


★인터뷰-명동마을 최고령 김재율 옹


"마을에 도둑한명  없는 착한 주민들"
마을 주민들에게 수소문 끝에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이자 명동마을에서 100여년 가깝게 살아온 김재율(95) 옹의 집을 찾았다. 대문을 열자 김 옹의 장남인 김태식씨가 반갑게 맞았다.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김씨는 김 옹의 건강을 돌보고자 틈이 날 때마다 서울에서 아버지를 찾아오고 있다. 김씨의 안내를 받아 김 옹을 만났다. 처음 본 김 옹은 거동이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100세를 바라보는 연세에 비하면 너무나 정정한 모습이었다.
 
먼저 안부를 묻자 김 옹은 "나이가 들자 안아픈데가 없이 모두 아프다"며 "특히 귀가 잘 안들려 불편하다 하지만 보청기를 끼면 개운치 않아 잘안한다"고 답했다.
 
이어 마을에 대해 김 옹은 "젊었을 때는 마을이장도 맡기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마을사람들이 인심이 좋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모습은 변함없다"며 "예부터 마을에 도둑이 한번도 없었을 만큼 사람들이 착하다"고 소개했다.
 
▲ 김재열 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만든 공적비.
또 공적비에 대해 김 옹은 "마을 심부름 잘해 사람들이 세워 준 것뿐 다른 의미는 없다"며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고향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공적비를 세울만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옹의 공적비는 일제때 저수지 뚝이 무너졌을 때 이장을 맡고 있던 김 옹이 군과 면에 인력동원 협조를 받아 지게와 바지게로만 제방을 쌓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김 옹은 "작년에 아내가 작고해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며 "자주 아들이 내려와 돌봐줘 고맙게 생각하고 3남 2녀의 자식들이 모두 잘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