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과 인덕 넘치는 아름다운 반촌마을
인심과 인덕 넘치는 아름다운 반촌마을
  • 장정안 기자
  • 승인 2009.01.23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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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
▲ 예부터 많은 선비들이 살아 학구열이 높고 마을 주민들의 성품이 인자한 벽송마을은 수많은 공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2009년 기축년(己丑年)도 어느덧 20여일이 지났다. 기축년 새해의 희망과 소망을 엿보기 위해 칠량면 동백리 벽송마을을 찾았다. 벽송마을은 강진읍에서 칠량방면으로 8㎞정도를 가다보면 좌측으로 칠량면 동백리에 속한 현천, 동백, 벽송마을을 가리키는 대형 표지석이 나타난다.
 
표지석을 따라 1㎞를 더 들어가면 세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가면 예부터 양반 촌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벽송마을을 만날 수 있다.

▲ 마을 앞 깨진밖에 마을 진입로 공사를 하면서 모아둔 바위들이 소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벽송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맨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깨진밖이라고 불리는 진입로에 놓인 5~6개 남짓의 대형 바위들이었다.

고인돌이라고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컸고 그냥 바위를 모아두었다고 하기에는 그 의미가 궁금했다. 궁금증을 안고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마을회관에는 8명의 주민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마을회관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기자의 갑작스런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벽송마을 주민들의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주민들을 만나고 마을 진입로에 놓인 바위들에 대해 물어봤다.
 
바위에 대해 장일순(73) 할머니는 "바위가 놓여 있는 곳이 깨진밖이라는 곳인데 예부터 마을 밖에 깨진 바위가 있어 깨진밖이라고 불렀다"며 "지금 바위가 많은 것은 마을 진입로 공사를 하면서 바위를 모아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마을 앞에 위치한 해남윤씨 제각은 일반적인 제각과는 다르게 양옥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더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회관에 자리한 주민들도 잘 모른다고 해 알 수가 없었다.

이어 마을에 대한 소개를 부탁하자 김금례(80)할머니는 "노인들밖에 없는디 자랑할게 머가 있다요"라고 답하면서 "그래도 예부터 벽송마을하면 반촌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벽송마을로 시집을 갔다고 하면 잘 갔다고 소문이 자자했을 정도다"고 소개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벽송마을에는 1612년부터 해남윤씨 입향조인 윤호찰(1612~1685)이 서당을 개설한 이래 해당직후에 야학에 이르기까지 한문과 한글을 주민들에게 가르쳤다. 이에 벽송마을 주민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은 마을이다.
 
학구열이 높은 벽송 마을은 유독 공직자를 많이 배출했다. 민선 초대 강진군수를 지낸 故김재홍 씨를 비롯해 故윤상하 초대 면장, 故 윤옥현 9·10대 면장 등 4명의 면장 등을 배출해냈다. 이만큼 벽송마을의 주민들은 항상 일하고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인구 감소로 예전의 명성은 이어지지 못하고 있지만 마을 주민들의 마음 한켠에는 예전의 자랑스러웠던 일들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 해남윤씨 제각 앞에 세워진 세장비는 지난 90년 해남윤씨 벽송대동종회원들이 모두 참여해 건립했다.
마을 회관에서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해남윤씨 제각이었다. 보통 제각이라하면 고풍스러운 한옥구조를 띄고 있는게 일반적이었지만 벽송마을의 해남윤씨제각은 다른 제각과는 달랐다. 일단 구조가 가옥의 형태가 이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해남윤씨제각은 일제시대 초부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지어져 있었으나 노후화로 허물고 지금의 양옥으로 개조해 해남윤씨 시제를 지내오고 있다.
 
해남윤씨제각을 나와 마을 우측에 자리한 함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함등은 큰 배의 형국이라고 해서 이 곳에 샘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에  함등에서는 배에 구멍이 난다고 해, 과거에는 샘을 파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함 등으로 오르다가 이정순(86)할머니를 만났다.
 
이 할머니는 "함등은 지금 10여가구에서 노인이 사는데 길이 좋지 못해 아주 고생이다"며 말을 시작했다. 이어 이 할머니는 "요즘 가뭄이 아주 지독스럽다"며 "벽송마을에서는 한 30~4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을 뒤 매봉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 놓고 불을 질러 비가 오기를 기원했다"고 했다.

또 "불도 지피고 돼지피도 바위에 뿌리는 의식을 통해 비가 오기를 기원했었지만 세월에 흐름으로 지금은 잊혀진 전통이 되어버렸다"고 밝혔다.

▲ 농한기를 맞은 마을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할머니의 말처럼 벽송마을은 10년에 비해 많은 것이 변했다. 매년 끊이지 않았던 아기울음소리는 끊어진지 오래됐고 반면 부음소식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급격하게 노령화되는 농촌마을의 가슴 아픈 현실에 마음 한켠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마을 출신으로는 마량면장을 역임한 윤영관씨, 부산시에서 초등학교 교장에 재임중인 윤명현씨, 군의원을 역임한 윤도현씨, 강진지역발전협의회 회장으로 재임 중인 김재정씨, 초대 민선 전남도의원을 역임한 윤영배씨 등이 있다.


인터뷰-벽송마을 부녀회장 박길자 씨

"농민들 허리 펴고 웃는날 빨리 오길"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마을회관을 찾은 박길자(62) 부녀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부녀회장을 10여년째 맡아오고 있는 박씨는 38년전에 장흥군 관산에서 강진으로 시집온 벽송 마을의 숨은 일꾼이다. 박씨는 "처음에 벽송마을로 시집와 마을사람들을 접했는데 워낙 마을사람들의 성격이 유순했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며 "예나 지금이나 인심과 인덕이 좋은 걸로 따지면 관내에서도 으뜸일 정도이다"고 자랑했다.
 
이어 박씨는 "예전에 젊은사람들이 많을 때에는 부녀회에서 모를 심어 수익금으로 부녀회 활동비도 쓰고 마을일에도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들의 연령층이 70~80대여서 부업거리를 할 수가 없는게 아쉬울 따름"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바람에 대해 박씨는 "특별하게 바라는게 없지만 지금처럼 마을주민들이 큰 다툼없이 한 가족처럼 오래오래 살아줬으면 하는게 큰 바람이다"며 "올해는 경제가 빨리 좋아져서 도시민이나 농민들이 허리펴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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