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로에서]고려청자의 고향, 중국 항주(杭州)를 다녀와서
[다산로에서]고려청자의 고향, 중국 항주(杭州)를 다녀와서
  • 강진신문
  • 승인 2009.01.02 1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희만<성화대 교수·한국사>
여행은 누구에게나 항상 설렘을 동반한다. 우리 일행은 강진문화원 국제교류 협력의 일환으로 7인이 우선 출발대로 선발하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때문일까 이동에 따른 피곤함도 잊은 채 탑승수속을 밟았다.
 
약 2시간을 날아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이라면 한번쯤 가고 싶어한다는 도시, 항주에 착륙하였다. 반갑게 맞이해주는 고고문물국 오견 국장 일행을 만나 인사를 하고, 4박 5일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예로부터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고 일컬어지는 항주는 기원전 5000년 경의 하모도(河姆渡)문화와 기원전 3000년 경 벼농사를 했다는 양저(良渚)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6세기 말의 수(隋)나라 때에 항주라 불렸으며, 1132년에 남송(南宋)이 금(金)나라의 공격을 피해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후 번창하여 마르코 폴로가 '세계 제일의 호화 부유한 도시'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도시다.
 
첫날 일정은 절강성 문물감정연구원 마쟁명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항주 출토 고려청자를 다수 보유한 그녀는 우리에게 그 고려청자의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하였으며, 이에 함께 한 무형문화재 36호 청자장 이용희 선생은 그 자리에서 '이 청자는 내가 살고 있는 집터에서 생산한 것이다'라고 즉석에서 감회를 쏟아내었다.

강진의 고려청자를 이역인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벅찬 감정이 교차하여, 우리 모두 탄성을 자아내며, 그곳에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국에서의 청자 사랑은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음날 일찍이 월주(越州)요지로서 유명한 절강성 자계(慈溪)시 상림호 요지 답사에 나섰다. 이 일대의 요지는 한(漢)대에서 남송시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생산활동이 이루어졌고, 현재도 200여 개의 요지가 남아 있었다.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끈 것은 40여 미터에 이르는 가마의 길이었으며, 이의 활용을 두고 여러 의견이 개진되면서 그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어 자계박물관에서 본 청자의 다양성과 기다란 가마는 여전히 궁금증을 더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다음날 우리는 남송관요박물관과 절강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자를 관람하면서 나름대로 안목을 키워나갔다.

그것은 중국의 은(殷)대부터 토기를 만들었으며, 한(漢)대에는 원시적 또는 초기적 청자가, 육조(六朝)시대에는 어느 정도 청자의 모습을 갖추고, 당(唐)대에는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晩唐)과 오대(五代)에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고, 공예적인 세련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남송관요청자, 용천요(龍泉窯)청자, 그리고 우리의 고려청자이며, 특히 상감청자는 최고의 명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항주청자와 고려청자의 기원과 편년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 영향은 간과할 수 없어 보인다.
 
마지막 날에는 첫날부터 우리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어 준 절강대학의 주소화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으며, 박물관 견학과 마역초 선생의 40여 년에 걸친 청자 파편 수집 이야기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환대 속에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비로소 자유 일정을 가지게 되었다. 인근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주기념관을 찾아 임시정부 요인들의 기나긴 광복활동과 애환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착도 가지게 되었다.
 
사실 항주하면 서호(西湖), 서호 없는 항주는 생각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서호는 시가지 서부에 펼쳐져 있으며, 춘하추동 4계절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바, 춘추시대 말기 오(吳)나라에 패한 월(越)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의 마음을 미혹해 나라를 기울게 하려고 미녀 서시(西施)를 보내어 숙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멀리 보이는 두 긴 둑은 이곳 지사로 부임해 온 당대의 백거이와 송대의 소동파 두 사람이 쌓았다고 하며, 서호 주변에 널려 있는 역사의 흔적은 왜 이곳이 항주인가를 가늠하는데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민간외교사절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번 항주 일대 고려청자의 흔적을 다양하고 상세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나, 기대 이상의 환영과 접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년간 절강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활동하였던 최한선 교수(전남도립대)의 역량과 노력의 결실이었다.

물론 강진문화원(김규식 원장)의 발주와 함께 참여한 이용희 선생, 신영호 자문위원, 황승도 이사, 이수희 회원의 적극적인 참여에도 박수를 보낸다.
 
강진문화와 고려청자의 발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는 민간외교사절뿐만 아니라 강진군의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 속에서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고려청자의 고향, 중국 항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비록 이번 여행은 그 출발이 미미하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창대하리라 본다. 모두가 참여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