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천면소재지를 지나 성전면 방면으로 500여m 따라 들어가니 북으로는 학동저수지가 있고 갈동마을이 냇가를 경계로 오붓하게 붙어있는 행정마을이 나타난다. 행정마을은 넓은 농경지를 마을 앞쪽으로 두고 동으로는 풍낙골과 용상리, 서로는 갈동리와 성전면, 남으로는 갈동마을, 북으로 학동저수지와 인접해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행정마을은 재를 담는 소쿠리처럼 생겼으며 설촌당시 마을 입구에 살구나무가 많아서 杏亭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주민들 사이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초기 남양홍씨가 마을터를 잡아 인근마을의 죽현과 더불어 살았고 이후 광산김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 행정마을에는 10여호 40여명의 주민들이 미맥농사로 생활하고 있다.
행정마을에는 마을회관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남양홍씨의 선산인 높은봉, 함양박씨문중 소유의 산이라는 데서 유래된 박산, 마을앞 농경지에 우뚝 솟아 있는 선돌 등의 지명이 오랫동안 주민들로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다.
찾아간 행정마을의 첫인상은 고즈넉한 모습을 담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으로 주민들이 주요 경작지로 이용하고 있는 들판이 펼쳐져 있고 마을 뒤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김장철이 시작되서인지 마을회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을회관을 나와 마을길을 따라 마을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남양홍씨 제각을 찾았다. 남양홍씨 제각은 조선시대때 홍구서라는 조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져 지난 64년에 보수공사를 마치고 매년 양력 4월 첫 번째 일요일에 시제를 모시고 있다.
아직도 관리인이 상주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날은 관리인을 볼 수 없었다. 홍씨제각을 나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지난 2004년에 강진향토문화유산 8호로 지정된 행정사였다.

행정사는 유황재라는 유림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돼 수많은 유림학자들을 배출해왔다고 전해진다.
행정사를 살펴보고 마을로 내려오다가 바깥바람을 쐬러 나온 할머니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해 이름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을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김할머니라고 밝힌 한 노인은 "행정마을은 조그마해 큰인물이 없을 것 같지만 홍씨 문중과 행정사가 있어 예부터 양반들이 많이 살던 양반촌이다"며 "서생들이 많다보니 예부터 부촌은 아니었다"고 마을을 소개했다.
이어 김할머니는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아 마을이 생동감이 넘쳤으나 지금은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이 65세 이상으로 늙은 사람밖에 없다"며 "얼마전만하더라도 부업으로 마늘을 재배하는 농가도 다수 있었는데 인력난으로 지금은 두 농가만 마늘농사를 할 정도로 젊은층이 없다"고 아쉬워했다.
마을주민들의 말처럼 지난 80년대에 행정마을은 40여호에 마을주민들도 100여명에 이르는 중규모 마을이었지만 도시로 나가는 인구가 크게 늘어 인구수가 30여년만에 3배정도가 줄어들었다. 인구가 줄면서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불싸움과 줄다리기 등의 전통놀이 문화도 자취를 감춰 아쉬움이 더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음에도 행정마을은 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정이 넘쳐나는 곳이자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정겹게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온 이들이 묵묵히 지켜나가며 언제나 그리워 찾아가고 싶은 고향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행정마을 출신으로는 광주에 소재한 병원에서 소아과에 재직중인 홍효숙씨, 강진에서 치과를 운영했었던 홍순임씨, 광주에서 치과원장으로 재임 중인 홍사라씨, 강진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홍재룡씨 등이 있다.
인터뷰 - 마을 주민 김용두씨
"본토박이 주민 많아 단합 잘되는 곳"
마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김용두(73)씨를 찾았다. 인기척을 듣고 나온 김씨는 머리가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었지만 힘이 있는 말투에서 정정함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마을에 대해 묻자 김씨는 "행정마을은 예전부터 선비들이 많다보니 성격이 유순하고 본토박이 주민들이 많아 단합심도 좋은 마을"이라며 "다른 마을도 다 비슷하겠지만 인심하나는 최고인 곳이다"고 소개했다.
이어 김씨는 "예전부터 행정마을은 미맥 위주의 농사를 지었지만 최근에는 몇몇 농가에서 마늘농사도 짓는 것 같다"며 "나도 2~3년 전만 하더라도 마늘농사를 지었지만 인력도 없고 시간도 없어 지금은 짓질 않는다"고 밝혔다.
이유를 묻자 김씨는 "아내가 지난해 갑자기 쓰러져 몸을 가누지 못해 간호하느라 1년째 갇힌 생활을 하다보니 시간을 낼 수 가 없다"며 "남편 뒷바라지와 5남2녀의 자녀들을 키우느라 병을 얻은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럽다"고 밝혔다.
김씨는 "자식들은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게하자고 하기도 하지만 30여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온 아내를 혼자 요양원에 놔두기가 그렇다"며 "기력이 다할 때까지 아내를 돌보는게 남편의 도리"라고 웃음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