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가 확실한 청자죠"
"족보가 확실한 청자죠"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7.11.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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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산 청자 3만여점 인양... 강진 선원들 목소리 귓전에 '생생'

▲ 인양작업을 총괄하고 있는 목포해양유물전시관 문완석과장(오른쪽)과 양순석 학예연구사가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청자를 어루만지고 있다.
지난달 18일 충남 태안군 근흥면으로 들어가는 2차선 도로. 도로변 곳곳에 대형프랭카드가 내걸려 휘날리고 있었다.

"고려청자의 고장 근흥면에 해저유물전시관을..."
"고려청자 유물전시관은 근흥면에 건립되어야 합니다" 이런 문구도 있었다.

"청자유물 인양하는 문화재청 직원 여러분 고생 많이 하십니다"

근흥면 내항의 한 식당 주인은 "주민들의 염원을 담은 그런 프랭카드가 50개도 넘게 걸려있다"고 소개했다.

지난 7월 쭈구미가 청자를 발견해 낸 근흥면 일대는 온통 고려청자 분위기였다. 근흥항에서 낚시점을 운영하고 있는 주민 김부곤(54)씨는 "해저유물관이 근흥면에 들어서면 수도권에서 관광객들이 폭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 현장에서 근흥항으로 기자를 마중나온 목포해양유물전시관 소속 양순석 학예연구사에게 "인양하는 분들을 격려하는 프랭카드도 보이더라"고 했더니 "태안은 온통 고려청자 분위기로 들떠있다"고 웃었다.

안흥항에서 고속 고무 보트로 5분정도 달려 나가자 멀리서 인양선이 보였다. 멀리 남쪽으로 바다가 열려 있었다. 남쪽으로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850년전 강진에서 청자를 가득실은 배가 올라오던 뱃길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개경이다. 청자의 꿈은 여기 죽도에서 바다속에 묻혀 버렸던 것이다.

발굴팀에 따르면 바다속에 묻혀있는 배를 분석했을 때 적어도 15명 이상의 선원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배에서는 당시 선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솥단지도 발견됐다.

청자와 함께 수몰된 강진 사람들의 비명이 귓가에 스쳐갔다.
사고소식이 곧바로 알려질 리가 없는 당시에, 개경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강진에서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사람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 청대합
고려청자의 역사 다시 적어야 할 대발견
바다는 조용히 출렁거리고 있었다. 태안선 유물발굴 현장까지는 고속 고무보트로 10여분정도의 거리였다. 배가 침몰한 지점은 육지와 그렇게 가까웠다. 행정구역으로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대섬 앞바다이다.

원래 어부 김용철씨가 쭈꾸미가 달라붙은 청자를 건저 올린 곳은 해안선 쪽으로 더 가까웠다. 

이에대해 현장 발굴 총 책임을 맡고 있는 목포해양유물전시관 소속 문완석 과장은 "배가 파도를 피해 연안에서 항해하다가 침몰돼 현재 발굴지점으로 밀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배는 난파지점보다 육지쪽으로 훨씬 더 가까이에서 항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침몰시간이 밤이었는지 낮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대 돛배를 타고 강진~인천간 뱃길을 항해했던 대구 미산마을의 박상렬옹(83)에 따르면 돛배도 야간운항을 하는게 일반적이었다.

태안선이 발견된 지점의 건너편 산은 육군탄약 실험장이었다. 주변이 모두 군사보호 시설이다. 물살이 험해 어민들의 출입도 뜸한 곳이었다. 급한 물살과 군사시설 덕분에 태안선은 근세들어서도 도굴범들의 손이 뻗치지 못하고 그 원형을 850년 동안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 청자사자형 향로
태안선이 발굴된 지점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조류가 빠른 해역이다. 예로부터 이 일대는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릴 만큼 선박 침몰 사고가 빈번했다. 태조∼세조 시절 60년간 이곳에서 선박 200척이 침몰하고 선원 1200명이 숨졌다고 기록이 있을 정도다.

또 여기서 북쪽 해안을 따라 2㎞ 정도 떨어진 관장목이라는 곳은 진도의 울돌묵, 강화의 손돌목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난류지역으로 꼽힐 만큼 물살이 센곳이다.

이 때문에 안흥앞 바다와 관장목을 거치지 않고 배들이 천수만에서 당산리쪽으로 직진할수 있도록 운하 건설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인종12년<1134년> 7월)와 태종실록(태종12년<1412년> 11월) 나오고 있다. 운하건설은 막대한 인명피해만 남기며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발굴자들 사이에 여전한 화제거리는 몇 일전 발견된 목간이었다. 탐진에서 개경으로 보낸다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분명히 적힌 목간이었다.

발굴팀의 김병근 박사는 "이번에 인양된 청자들은 목간을 통해 족보가 확실히 나타났기 때문에 가치가 훨씬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과장과 김박사는 강진에서 온 손님이기 때문에 특별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잘 감싸놓은 포장 하나를 풀었다. 당일 오전에 인양된 목간이었다. 목간은 막 잘라낸 나무조각 처럼 싱싱한 물기를 지니고 있었다.

▲ 두꺼비형 벼루
발굴현장에서 막 건져 올린 유물을 구경하는 것은 낚시바늘에 막 걸려 나온 파닥거리는 자연산 활어를 보는 느낌이었다. 기자는 무릎을 꿇고 코를 그곳으로 가져갔다. 바다내음, 고려시대 시끌벅적했던 뱃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문과장과 김박사가 잠시 후 보여준 것은 12개의 작은 합이였다.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작은 분단지였다. "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중의 하나를 손에 들고 뚜껑을 열었다. 목간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코를 가져갔다. 눈을 감았다. 고려 여인의 요염한 분내음이 스며나오는 것 같았다.  

진품명품에 나가면 하나에 얼마나 되겠느냐고 살짝 물어 보았다. 하나에 적어도 2천만원은 넘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합에 상감이라도 새겨져 있다면 하나에 5천만원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했다. 침을 소리나지 않게 삼켰다.

▲ 발굴팀은 세척의 배로 나눠 작업이 진행됐다.
지난 7월 초부터 계속된 발굴작업은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발굴팀은 10월말에 철수를 하고, 나머지 마무리 발굴은 내년 봄이 되면 재개 할 계획이었다. 지금까지 3만여점의 청자가 인양돼 올라왔다.

건져올린 고려청자는 '태안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태안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임시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그곳으로 갔다. 강진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 했어야 했다.

사실 우리가 보는 국보급 청자라는게 세월과 손떼에 찌들어서 제 색깔을 내는 것들이 극히 드물다. 그러나 바다에서 건져올려 적당히 처리한 청자는 완전히 달라보였다. 감탄과 탄성 없이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빛깔, 그 은은함, 그 정교함, 그 아름다움.... 유리케이스속에서 특별관리를 받고 있는 '두꺼비벼루'는 두꺼비의 눈매가 하도 사실적이여서 금방이라도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뛰쳐나올 것 만 같았다.

▲ 태안문화예술박물관에서 열린 발굴문화재 전시장에서 현지주민들이 청자향로와 두꺼비형 벼루를 감상하고 있다.
전시장 한켠에는 태안선에서 건져올린 청자와 강진청자박물관에 보낸 같은 문양의 청자편을 함께 전시해 태안선의 청자들이 강진에서 생산됐다는 점이 분명히 나타났다.

강진신문은 태안선 발굴유물의 강진 전시를 위해 유물인양을 담당하고 있는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관장 성낙준)측과 협의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태안선에서 인양된 유물을 일단 목포전시관으로 모두 옮겨 온 다음 보고서 작성등의 절차를 거쳐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강진군은 태안선 유물의 일부를 영구임대해 청자박물관에 전시하는 방안을 협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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