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학술세미나 지상중계
고려청자 학술세미나 지상중계
  • 김철 기자
  • 승인 2007.09.14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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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세미나가 열린 청자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참석자들이 진지한 모습으로 학술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영남지역 지방낙향 귀족들 청자 부장품 매장"
"호남지역 청자분묘유물 시대별 변천사 명확"

차순철<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 차순철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고려시대는 이전 고대사회와 달리 관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지방에 자리잡았던 호족 세력들은 점차 수도인 개경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근거지인 지방은 장원과 같은 농장이 경영되면서 경제적 기반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영남지역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고려분묘는 횡구식석실분, 수혈식석곽묘와 목관묘(토광묘 포함)로 구분되며 일부의 사례지만 와관묘와 같은 특수한 사례도 확인된다.

이러한 묘제의 차이는 앞서 선학들의 지적처럼 피장자의 신분과 관계될 가능성이 크며, 함께 부장된 유물내용으로 볼 때 이러한 추정은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일부지만 개성지역에 주로 축조된 횡구식석실분의 존재는 지방에 낙향한 사대부의 분묘로 내부를 장식한 벽화와 칠관 등의 사용은 중앙귀족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횡구식석실분의 경우 그 분포가 독립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역시 일반적인 형태의 분묘가 아님을 입증한다.

수혈식석곽묘의 경우 고려초~중기사이에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내부에는 목관을 사용한 경우도 확인된다. 청자 보다는 청동제 금속용기의 부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청동제 용기의 부장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나타낸다.

화장묘는 장골용기를 사용했는데, 목제 용기를 사용한 경우도 있다. 와관묘는 일부 확인되며 상감청자 등이 부장된 경우가 있으므로 일반민들이 사용한 분묘형태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석관묘의 경우 영남지역에서는 확인된 사례는 드물지만 일부 조사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묘제가 아닌 점은 향후 과제로 남는다.

고려시대는 사회구조가 복잡하고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를 일상생활에 수용하는 등 장묘문화에 있어서도 전대와 구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근기지역과 지방 사이에는 현격한 격차가 존재하였고, 이러한 차이는 분묘의 축조와 유지 그리고 지속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뚜렷이 구분되어진다. 

이후 조선 건국직전까지 낙향한 사대부 등에 의해서 분묘가 축조되지만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집중현상은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고려시대 분묘는 고려 중기이후부터는 점차 지방 향리세력과 일반민의 분묘 축조를 제외한다면 지속되지 않았다고 추정되며, 이는 전국적으로도 공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고려릉 출토 청자의 연구

한성욱(성보박물관 학예실장)

▲ 한성욱
성보박물관 학예실장


사람이 죽은 후 사후 세계를 위한 승법은 매장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 경우 일상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시를 중심으로 부장품을 매납하고 있는데, 신분과 재력에 따라 그 질이 결정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에 부장된 유물은 당대 최고품으로 매장풍습 뿐만 아니라 심미안과 문화상, 생활상 등을 유추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능에서 출토되는 청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매납시기가 정확하며 재질적 특성상 오랜 시간이 지나도 형태가 변하지 않아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고려시대 왕과 왕비의 능에서 출토되는 청자는 모두 능과 관련된 유물이지만, 목적과 시기에 따라 축조시의 부장품과 제의품, 축조 층위에 포함된 유물, 추가장에 의한 부장품, 축조 이후 제례의 산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상이한 성격의 청자는 문헌 등의 검토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여야 그 성격을 밝힐 수 있다. 고려시대 능은 석실분이라는 구조적 특징으로 도굴에 쉽게 노출되어 부장품이 매우 빈약하다.

또한 대부분의 국왕이 검약을 강조하는 유서를 남기고 있어 원래부터 부장품이 간단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능에서 출토되는 청자 부장품과 제례용기는 일상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시를 중심으로 잔, 병, 호, 주자, 향로, 통, 방형대 등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들 다양한 종류의 청자들이 함께 매장되었으나 도굴 등으로 부분적으로 출토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능을 축조하거나 수축하면서 매납한 청자는 그 시기가 정확하여 청자의 변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려시대 능 출토 청자들은 초기청자(원창왕후 온혜릉과 정종 안릉)와 전성기 청자의 발전(인종 장릉)과 변화(희종 석릉과 원덕태후 곤릉, 명종 지릉), 후기청자(인덕태후 정릉)의 쇠퇴 등을 보여 주고 있고 고려청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어야 하겠다.

호남지역 고려분묘 출토 청자의 성격

김병수(목포대학교박물관 연구원)

▲ 김병수
목포대학교 박물관 연구원

분묘의 형식변화와 출토청자를 통해 호남지역 고려분묘의 시기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기는 석곽묘 단계이다. 출토유물은 다른 형식에 비해 빈약한 편이며, 토기류와 도기류가 가장 많이 확인된다.

기존의 연구자들이 고려분묘의 1기를 고려가 건국되는 918년으로 설정한 것과는 차이가 있는 시기설정이다.

이는 청자의 발생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반도의 청자발생에 대한 학계의 주장은 통일신라기 발생설(9세기설)과 고려초기 발생설(10세기설)로 크게 구분된다.

2기는 석곽묘 단계이다. 이시기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해무리굽 청자완과 청동용기류가 특징적이다.

해무리굽 청자완은 초기청자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10~11세기에만 확인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청자병, 청자대접, 청자접시 등 석곽묘에는 부장되지 않던 청자유물의 부장이 시작되고 있다.

청동용기류의 부장 역시 석곽묘에서 시작되며, 그 비율도 33%로 다른 유물에 비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시기는 앞서 사료에서도 확인했듯이 청동용기류가 보편적으로 사용됐던 시기였으며, 반면 청자류는 귀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3기는 석곽묘와 토광묘가 주요 묘제로 사용되는 단계이다. 3기는 12~13세기대로 역사적으로 볼 때 고려의 갈등기이지만 자기류는 전성기를 이루는 시기이다.

12세기부터 13세기 전반에 이르는 고려중기 청자는 중국에서도 인정할 만큼 그 기량이 절정을 이룬다.

백자와 흑자의 제작이 활발해지고, 청자에서도 비색의 음·양각청자를 비롯한 순청자와 상감청자, 진사채청자, 상형청자, 철화청자 등 다양한 청자들이 제작되었다.

4기는 토광묘가 주로 사용되는 단계이다. 청자는 14세기가 되면 실용성과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질적으로는 더욱 퇴화되어 기벽은 두터워지고, 기형은 대형화되면서 둔중해지고 구연은 대접의 경우 대부분 내만되며, 굽도 13세기때 청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어진다.

 이는 곧 이시기에 정치·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즉 국가의 통제권이 약해진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분묘의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비단 호남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13세기 중반 이후 석곽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은 전국적으로 보여 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고려후기 몽고의 정치간섭과 수탈, 왕권의 약화는 곧 이러한 분묘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지역 고려고분 부장품의 양식

남진주(충북대학교 강사)

충북대학교 강사

충청지역 고분 부장품을 그 시기적인 특징과 유물의 조합상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보겠다.

먼저 시대양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고려 전기 해무리굽완을 중심으로 제작된 자기와 통일신라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 도기편병의 조합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려 전기 토기에서 청자로의 전환점을 잘 이해하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시기적인 특징을 보면 전기에는 해무리굽완과 도기편병을 중심으로 한 동반관계가 형성되나 부장량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면 많은 양의 다양한 부장품이 동반된다.

청자는 강진이나 부안의 생산품으로 보이는 양질의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방에서 제작된 저품질의 청자이다.

그러나 유물의 조합은 강진과 부안양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수지만 상감청자가 동반된다.

금속유물도 다양한 종류가 보이는데 특히 다수의 동경이 동반되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후기는 상감청자가 주를 이루는 동반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상감청자의 질이 떨어지고, 무늬도 도식화, 장식화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속유물의 변화는 더욱 뚜렷해져서 가위는 손잡이가 2개인 2형, 청동발은 굽을 따로 만들어 부착하는 4형의 점유율이 많아진다.

일련의 과정에서 충청지역의 지역색이 도출되었다. 충청지역 고려 고분 부장품의 양식은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량의 금속유물과 매병 · 주자와 같은 특수기종이 부장되는 지역색을 보인다.

즉 30점 이상의 동경의 부장과 동반유물을 통해 아직까지는 부족하게나마 시기를 설정할 수 있었고, 상징성이 강조되던 고대의 의미가 변화되어 생활용구로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을 이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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