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도암면 영동마을
[마을기행]도암면 영동마을
  • 주희춘 기자
  • 승인 2007.06.22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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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씨 문충공파 첫 입촌 조산·양락·양유동 평화롭게 공존

들녘은 모내기가 거의 끝났다. 물논에 안착하기 시작한 작은 모포기들이 파릇파릇 생기를 보이고 있다.

4월부터 시작된 농번기가 한풀꺾여 이제 농민들은 잠시 숨을 돌리고 평화롭게 들녘을 바라 볼 때다.

강진읍에서 완도방면으로 내려가다 계라리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파릇파릇한 들녘의 동쪽끝에 작은 마을이 있다.

다시 오른쪽을 보면 옛 도암북초등학교 바로앞에 또 마을이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 좌측을 보면 냇가옆에 몇 채의 집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세곳의 마을이 바로 영동마을이다. 세 개나 되는 작은 마을을 합해서 만든 행정마을이다 보니 다소 낫설기도 하다. 마을간 거리도 가깝지 않다.

양유동과 조산과는 거의 1㎞ 정도가 떨어져 있고, 양유동과 영락의 거리는 이보다 조금 멀다. 대신 조산과 영락은 작은 야산을 두고 마을이 나뉘어 있다.

마을주민들이 잘 단합이 되지 않을 구조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은 "마을사람들의 성격이 모두 유순해서 어느 마을 보다 단합이 잘되는 편이다"고 말했다. 영동 주민들에게 '세 마을 한 가족'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각각의 마을에는 고유의 이름이 있다. 동쪽에 있는 영동마을 1반은 조산이라고 한다. 마을뒷산이 낚시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고 한다.

또 조산마을 남쪽에 있는 영동마을 2반은 영락(永樂)이란 명칭으로도 불리운다. 길게 향략을 누린다는 뜻으로도 풀이되고 마을앞 시냇물의 모양이 긴 악기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는 설도 있다.

영동마을 3반은 양유동(楊柳洞)으로 불린다. 예전에 마을에 수양버들이 많아 부른다는 이름이다. 영동마을은 3반에 마을회관이 있다.

가구수도 20호로 3개 반중에 가장 많다. 예전에는 3반과 거의 맞닿아 북초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왕래하는 사람숫자도 많았다. 그런데 양유동을 1반으로 하지 않고 가장 끝자리 숫자인 3반으로 한 것이 궁금했다.

박세봉이장(64)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 온 관례라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양유동이 세곳중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보니 마을화합을 위해 반 순서는 제일 마지막으로 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반의 순번을 정하는 것도 주변 작은마을에 대해 배려를 했던 것이다. 마을의 최초 입성 성씨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조 중엽에 사람이 들어왔다고 한다.

강진군이 발행한 '강진군 마을사 도암면편'에 따르면 제주고씨와 해남윤씨, 전주이씨등이 1800년대 중반부터 차례로 입촌해 마을이 형성됐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중에서 가장 먼저 입촌한 제주고씨는 문충공파 중시조인 말로(末老)로부터 26세손인 고현징(1840~·1901)이다. 그가 해남 문내면에서 영동마을 양유동에 입촌하면 제주고씨가 많이 살게 됐다고 한다.

현재는 제주고씨를 비롯해 밀양박씨, 해남윤씨, 전주이씨등 총 20여개가 넘는 성씨가 마을을 이루며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영동마을은 마을이 서로 떨어져 있다보니 누구보다 이장들이 고생을 한 마을이기도 하다. 지금은 양유동마을에 큰 스피커가 설치돼 있고, 각 가정에 전화가 보급돼 있어 각종 소식을  전하기기 쉬워졌지만 마이크도 없던 70년대 초반까지는 보통일이 아니였다.

마을이장이 매일 새벽이면 1반~3반까지 십리도 넘는 길을 매일같이 돌며 이런저런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는 자전거가 나왔지만 당시만 해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장들이 귀할 때였다. 지금도 마을주민들은 어두 컴컴한 새벽부터 마을을 순회하던 이장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북초등학교를 끼고 있던 양유동(3반)은 1999년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만 해도 학교앞 마을로서 그런데로 아기자기함을 누렸다. 

마을에 작은 가게들도 몇 개 있었고, 자취나 하숙하는 선생님들도 있어서 마을이 제법 시끌벅적 했었다. 학생수가 한때 500명에 달했으므로 그럴만도 하다. 또 마을 주변이 해남과 완도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마을을 거쳐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인구가 줄어들고 학생들이 줄어들어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마을의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학생들이 버글거리던 학교는 요즘 모텔이 들어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양유동에서 지석리로 넘어가는 도로의 작은 언덕에 고개돌려 봐야 할게 있다. 차를 몰고 지나가버리면 보이지 않지만 전남도민속자료 제 28호인 영모당(永慕堂:1687년에 건립된 해남윤씨 문중제각)입구 부근에 작은 집터가 보이고, 이곳을 살피다 보면 작은 샘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참샘(寒泉)이다.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명물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일대를 한천동이라고 부르고, 샘이 있는 지점을 참샘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영동일대를 모두 참새미라고 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샘 옆에는 집이 두채나 있었다. 그 집들은 지금은 폐허가 됐으나 샘은 지금도 살아서 물을 품어대고 있다.

참샘이 '전설의 고향'에 방영 됐던 전설을 들어보자.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숙식을 청했다.

가난한 노부부는 대접할게 없었으나 스님을 맞아  조상 제사때 쓸 쌀로 밥을 지어 스님에게 대접했다. 그런 정황을 알고 있는 스님은 다음날 떠나며 부부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부부는 먹는물이 없어 항상 십리길을 걸어서 물을 길러온다고 했다. 스님은 마당의 한 지점을 가르키며 저곳을 파보라고 했다. 그곳을 조금만 파내려가자 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냥 샘물이 아니였다. 만병을 고칠 수 있는 약수였다. 이 샘물이 약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부부는 생활도 괜찮아 지고 행복하게 살았다.
▲ 만병을 고칠수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참샘'

전설은 오간데 없으나 샘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곳을 잘 정비해서 전설을 되살리면 적지 않은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보였다.

참샘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나 영동마을 주민들은 항상 물부족에 시달린다. 인근에 저수지가 없어서 영농철이면 조금만 가물어도 물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상수도가 없어 각자 지하수를 쓰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에 상수도 시설이 잘 갖춰어지고, 수리시설이 안정되면 더 살기좋은 마을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영동마을 이종민(71)씨는 1반인 조산에 살고 있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 물을 보러 나가는 길이었다. 농번기를 보냈기 때문인지 많이 피곤해 보였지만, 모내기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이씨는 "3개 마을이 떨어져 있어 때로는 단합이 어려울 때도 있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항상 함께 하고 서로 돕고 있다"고 말했다.

영동마을 일대는 쉽게 느낄수는 없지만 상당히 높은지대 마을이다. 강진읍에서 내려가다보면 영파리에서  한참을 올라가야 덕서리가 나오고, 조금지나 계라리와 영동마을을 만나는 형국의 높은 지대에 있다. 기온이 다른 곳 보다 2~3도 춥다고 한다.

이씨는 "바람이 강진읍쪽에서 넘어오고, 도암면 소재지 쪽에서 올라와 만나는 곳이기도 하는 곳이여서 특용작물을 하기가 어렵다"며 마을에서 비닐하우스를 구경할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씨는 "갈수록 빈집이 늘어나서 걱정이다"며 "둘이 살다가 혼자가되고 혼자살다 그 사람마져 가면 빈집이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농촌의 실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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