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호)마을기행 신전면 봉양마을
(216호)마을기행 신전면 봉양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3.0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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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 폭설과 추위가 지나간 뒤 겨울 햇살은 따스하기 그지없다. 따뜻한 날씨에도 그늘진 곳엔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채 하얀 여운을 남기고 있다. 황량하게 제 살갗을 드러낸 들녘의 잔설은 계절의 변화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강진읍에서 출발해 도암을 지나 해남방면을 달리다 찾아간 곳은 신전면소재지에 위치한 봉양마을이다.

봉양마을은 동쪽으로 노해마을, 남쪽으로 백용과 대월마을, 서쪽으로는 주작산이 해남군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삼인마을과 접하고 있는 곳이다.

마을 뒷산인 주작산을 봉황과 같다고 보는 이가 많아 마을이름은 주작과 관련해 새 ‘鳳’자를 썼고, 남쪽을 뜻하는 햇볕 ‘陽’자를 써서 鳳陽이라 하였다.

봉양마을에 언제 누가 처음으로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의 동북쪽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주 지씨가 처음 입촌해 살았다고 하나 자료나 후손이 없어 그 내력을 알 수 없고 조선시대 보주정씨가 입촌한 것으로 알려진 봉양마을은 차례로 파평윤씨, 분성배씨 등이 이주해 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뒷산인 주작산이 위용을 갖추고 있는 봉양마을은 현재 65가구 25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면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는 마을로써 1970년대 야산지역이 대부분이었는데  밭으로 개간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워 한때는 누에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누에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현재는 뽕나무는 찾아볼 수 없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미맥위주의 농사를 짓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접시형국에 우물을 판후 폐촌되었다는 설이 있는 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평, 마을회관 앞 들녘으로 해남윤씨가 자리를 잡고 살다가 폐촌되었다는 장동, 봉양과 삼인마을 사이의 들녘으로 옛날 배들이 풍파를 피하기 위해 배를 묶어 두었던 선박골, 바위굴 속에 이빨빠진 늙은 호랑이가 살았다는 개호랭이굴, 삼인마을위 중샘의 우측 골짜기인 더풀게, 더풀게 우측 하단으로 큰 소나무 두그루가 있었다는 뒷솔나무터, 뱀을 죽이면 화를 피하기 위해 나뭇가지에 걸어 화장했던 배암걸치,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마을앞 우물인 큰샘, 주자산 중턱에 있는 중샘, 조선시대 오남 김한섭선생의 서당이 있었던 초당터 등이 마을 곳곳에 명칭되고 있다.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찾아간 곳은 봉양마을 회관. 마을회관에는 2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개발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도선(73)씨는 “우리마을은 한겨울에도 따뜻한 곳으로 마을주민들간의 화합이 잘된다”며 “30여년전에 새마을 운동 우수 시범마을로 선정되었고 신전면 내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사용한 마을이다”며 마을자랑을 털어놨다. 옆에 앉아 얘기를 듣고 있던 김재윤(78)씨도 마을 소개를 덧붙였다.

김씨는 “우리마을은 10여년전에 나락 100석으로 공동자금을 조성해 여기에서 나오는 이자수입으로 마을살림살이를 해결한다”며 “가구마다 거출하는 돈이 거의 없으며 불우이웃돕기성금, 적십자회비등도 이자수입으로 낸다”며 마을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마을주민들은 반가운 손님이 왔다고 간단한 다과를 내놓으며 마을뒷산인 주작산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예부터 주작산 줄기밑에는 노서하전, 옥녀단벽, 장군대좌, 옥등괘벽, 개두혈, 정금혈, 운중복월, 월매등이라고 불리우는 팔명당이 있는데 옥등괘벽은 연안차씨의 조상이 묻혀 있다고 하며, 계두혈은 도강김씨가 자리를 잡았고, 정금혈은 전주이씨가 조상을 모셨다고 한다. 이렇게 세곳은 확실히 찾았으나 다섯 개의 명당은 주작산 어딘가 아직 남아 있어 마을주민들은 지금도 묘를 쓰는데 있어 많은 신경을 쓴다.

매년 1월1일 주작산 정상에서 주민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해맞이제가 열리고 있으며 올해는 300여명이 참여했다.
마을주민들과 마을에 대한 얘기를 나눈 후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신상만(40)이장과 마을 좌측 밭에 있는 고인돌을 보러 갔다. 밭가운데 있었다는 고인돌은 현재 밭 둑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였다. 규모는 장축 290㎝, 단축 160㎝, 두께 70㎝이며 형태는 장방형이었다. 지석두개가 있었으나 훼손되고 없었다. 귀중한 문화유산이 아무런 보호없이 방치되고 있어 보는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봉양마을에서는 광복후부터 마을청년들이 추석명절에 신파극을 마을주민들에게 공연해 인근마을주민들까지 구경을 왔다. 마을청년들이 틈틈이 각본을 쓰고 공연연습을 해 무대에 올린 신파극은 인기가 좋아 봉양마을은 신파 잘하는 마을이란 소문이 인근마을까지 퍼졌다. 1980년대까지 유지해오던 신파 공연은 시대의 변화와 인구감소 등으로 중단되었다. 또한 설날 때 60세이상 마을노인에게 합동세배를 했으나 인구감소로 10여년전에 사라졌다.

봉양마을주민들은 단합이 잘돼 민간조직을 통해 마을 애경사를 함께 한다. 60년대 상포계를 조직해 상을 당했을 때 함께 하고 있으며 마을의 장남들이 뜻을 같이하여 장자계를 통해 객지에 나가서 살더라도 명절을 기해 1년에 2회씩 만나 마을 애경사를 같이 한다.

넉넉하지 않는 생활이지만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봉양마을 주민들에게 한가지 작은 바램이 있다. 신전면에서 마을회관으로 오는 농로 400m가 아직 포장되지 않아 농번기철 불편이 많다. 비가 오면 경운기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여서 하루 빨리 포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겨운 감흥에 젖어 마을을 둘러보는 사이 짧은 겨울 해는 어느덧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금새 싸늘해진 저녁 공기보다 서로 나누며 정겹게 살아가는 마을주민들의 따뜻한 사람사는 정이 마을을 나서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봉양마을출신으로는 신전면장을 역임한 윤중채씨,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고정근씨, 상업은행 지점장을 역임한 윤현엽씨, 서울에서 경찰로 근무하는 김한석씨, 남도대학 강사로 출강하는 김창영씨, 신전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윤동석씨, 읍사무소에 근무하는 김선재씨, 군청에 근무하는 오경재씨가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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