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칠량면 명주리 명주마을
[마을기행]칠량면 명주리 명주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7.04.27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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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남짓 주민들 '오순도순'

칠량면소재지를 지나 장흥군 관산읍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지방도를 따라 한참을 달려가면 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명주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명주저수지를 지나 고갯길 '골투재'를 넘으면 바로 관산읍이다. 장흥과 지척인 마을답게 천관산의 모습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명주마을은 명동, 신기, 연주동이 한 동네를 이루고 있다. 문헌상 명주마을의 옛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호구총수(1789)에 칠량면 28개 마을 중 연주동이 기록돼 있다.

이후 연주동과 명동이란 지명이 1912년 기록에 나오지만 신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가장 늦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신기는 주로 명동에 포함돼 있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명동과 연주동의 지명을 각각 따서 현재의 명주마을로 불리게 됐다. 

같은 법정리인 사구마을도 광복 후부터 80년대 초까지 명주마을에 속해 있었지만 분구되면서 각각 마을을 이루고 있다. 70년대까지 가구수 100호 넘는 마을이었으나 분구와 이농현상 등의 이유로 현재 40호 남짓 남아있을 뿐이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30여호가 모인 큰 동네가 연주동이다. 노승이 염주를 가지고 불공을 드리면서 머무르던 지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신기는 명주교 좌측에 있으며 현재 3농가가 생활하고 있다. 면소재지에서 명주마을로 들어오면 처음 보이는 곳이 명동으로 5농가가 모여 있다.

▲ 남도 끝자락에서 시작된 봄은 명주마을 곳곳에 찾아들었다. 길섶 돌담 옆에 활짝 핀 유채꽃이 봄의 운치를 더한다.
연주동 뒷산인 뒷골은 쥐의 형국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마을 앞산에 해당하는 안산엔 고양이를 닮은 괴바우가 서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괴바우가 뒷골의 쥐를 위협하기 때문에 마을에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속설에 따라 대나무를 많이 심어 괴바우가 보이지 않게 했다는 옛 얘기가 전해져 온다.

장흥으로 넘어가는 골투재에도 민간신앙이 남아 있었다. 예전 이 골짜기에 있던 한 그루의 아그배나무에 지나가는 행인이나 어려운 일을 당한 주민들이 돌을 던져 소원을 빌었다. 이 민간신앙에서 골투(谷投)란 지명도 생겼다.

명주저수지 바로 밑엔 마을의 사장나무였던 팽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명주마을의 역사를 대변하듯 수령 500여년의 팽나무는 1996년 저수지 준설공사와 함께 베어졌다. 예전 주민들은 이 나무의 잎이 피는 모양으로 그해 농사를 점쳤다는 것. 잎이 일제히 피면 전국적으로 대풍이 든다고 믿었다.

또 동쪽의 잎이 먼저 피면 남부지방에 풍년이 들고 서쪽의 잎이 먼저 피면 북부지방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신고 다니던 짚신이 낡으면 짚신에 오줌을 싸서 나무 밑에 묻어줬다. 나무에 거름을 주는 뜻으로 잎이 고르게 피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장흥과 경계가 되는 골짜기인 미새기골도 재밌는 유래를 담고 있다. 옛날 장흥군에서 세금을 받으러 오면 강진땅이니 강진고을에 내야 한다고 돌려보내고, 강진군에서 오면 장흥땅이니 장흥에 내야 한다고 하여 양쪽 군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마을회관에서 요가를 배우는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70~8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색시인냥 밝은 표정이다.
명주마을에 도착해 찾은 마을회관엔 6명의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지난 1월부터 주 3회 요가를 배우는 주민들이다. 이날도 군보건소에 나온 강사와 함께 1시간 남짓 요가 강습을 막 끝낸 참이었다. 너무도 밝은 표정에서 70~80대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주민 주진례(83)씨는 "지방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가리재, 골투재를 넘어 장흥을 오가야 할 정도로 오지마을이었다"며 "시집올 당시만 해도 우마차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비포장도로를 통해 마을에 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주민 홍정실(75)씨는 "산간마을이라 보니 작은 농토에서 나오는 곡식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며 "그래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엿을 만들어 대덕장, 관산장, 마량장, 칠량장 등에 내다 팔았다"고 말했다.

명주마을은 엿 만드는 마을로 유명했다. 마을 아낙들이 만든 엿은 인근 장은 물론 나주 영산포에 있던 대형 과자공장으로 납품될 정도로 엿을 만들지 않는 집이 없었다.

현재 70~80대 주민들이 시어머니로부터 엿 고는 방법을 배웠으니 명주마을의 엿은 1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셈이다. 하지만 차츰 엿 소비가 줄어들면서 명절에 맞춰 각 가정에서 쓸 정도의 엿을 만드는 데 그치고 있다. 

주민 윤야무(77)씨는 "쌀과 조로 만든 식혜를 졸여 가며 엿을 만들기 때문에 장작이 많이 필요했다"며 "당시에는 인근 산에서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점도 마을에서 엿을 많이 만든 이유였던 것 같다"고 짐작했다.

명주마을은 벼농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소득원을 꾸준히 개척해왔다. 일찍부터 딸기, 장미 등 시설원예에 눈을 돌린 주민들도 있고 축산으로 농가소득을 높이는 주민들도 있다. 억척스레 삶을 일궈온 주민들의 희망이 최근 한미FTA(자유무역협정)타결 등 세파에 꺾이지 않길 기대해 본다.

명주마을 출신으로는 칠량농협 상무를 지낸 김홍규씨, 광주에서 경찰로 근무하는 김종인씨, 조흥은행 서울 역천동 지점장을 지낸 주기식씨, 서울에서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최성찬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마을회관에서 안길을 따라 마을 곳곳을 둘러보던 중 50여㎝ 높이로 자란 꼴을 베고 있던 이방현(54)씨를 만났다.

지난해부터 송아지 5마리를 키우기 시작한 이씨는 사료를 조금이나마 절약하기 위해 겨우내 자투리땅에 초지를 조성했다. 이날 이씨는 400여평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베어다 여물로 쓸 요량이었다.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곤 고향인 명주마을을 지켜온 이씨는 마을이장을 맡기도 했으며 장미재배농가들의 모임인 땅심화훼조합법인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하던 중 고추를 멀칭재배하는 광경을 처음 봤다"며 "제대 후 고향에서 처음으로 시설작물 재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고추, 오이를 재배해 본 다음 1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장미를 키우고 있다"며 "한때 5만평에 육박하던 전체 장미재배면적이 현재 절반가량 줄어든 것을 보면 안타까움이 앞선다"고 덧붙였다.

마을주민에 대해 이씨는 "농지가 적은 산간마을에서 좀더 소득을 얻기 위해 참 부지런하게 사셨던 분들"이라며 "어릴 적 정성껏 만든 엿을 머리에 이고 인근 장으로 팔러나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설명했다.

또 이씨는 "칠량면에서 농악 잘하기로도 소문난 마을이었다"며 "인근에 알려질 만큼 솜씨 좋은 상쇠가 많이 배출됐기 때문에 명절이면 풍물소리가 온 마을에 보름 정도 울려퍼졌다"고 소개했다.

이씨는 "예전보다 마을 규모는 줄었지만 부지런하고 인정 넘치는 마을의 전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동네"라고 자랑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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