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군동 쌍덕리 평덕마을
[마을기행]군동 쌍덕리 평덕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7.03.16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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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동 쌍덕리 평덕마을 전경.
꽃샘추위가 지나고 완연한 봄이 왔다. 남도의 끝자락에서 올라온 봄기운은 어느덧 곳곳에 파고들었다. 여느 길섶에나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이름 모를 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의 정취를 더욱 화사하게 한다.


강진읍에서 마량방면으로 향하다 군도 14호선을 택해 2㎞ 남짓을 가면 군동면 쌍덕리 평덕마을에 이른다. 세 개의 불상이 서 있었다고 전해지는 삼바래기산(삼불산) 아래 50여호가 옹기종기 모인 평덕마을이 위치해 있다.

마을은 해가 비교적 잘 비치는 위쪽에 자리한 양지쪽과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양지쪽보다 해가 적게 비친다는 뜻을 지닌 응달, 골짜기 안의 마을이란 의미의 안골로 각각 나눠진다. 현재 양지쪽과 응달이 1반 큰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2반은 안골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평덕마을의 유래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등에 따르면 고려말, 조선초의 특수지방행정구역인 평덕향이 현재의 쌍덕리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를 근거로 평덕향의 위쪽에 들어선 마을이란 의미를 담아 상평덕으로 전해져오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같은 법정리의 평덕마을과 쌍덕마을로 각각 나눠졌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까지 유지됐던 대곡면의 소재지가 평덕마을이었다. 당시 마을의 규모는 130호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 마을입구에 수령 200년을 자랑하는 팽나무 두그루가 자라고 있고 나무아래 주민들의 휴식처인 정각이 세워져 있다.
평덕마을에 첫 터전을 잡은 것은 분성 배씨였으며 이후 장흥 위씨, 언양 김씨 등이 정착했다. 마을에 처음 정착한 배씨에 대한 유래는 마을 앞 농경지에 남아있는 굴레바위에 얽힌 이야기로 전해져온다.

구유바위 또는 구시바위로 불리며 장구처럼 생겼다고 하여 장고바위로도 불리는 2개의 바위는 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2m 높이로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이 바위는 평덕마을에서 자작일촌을 이루며 번성하던 배씨가 쇠퇴하게 된 전설을 담고 있다.


예전 굴레바위는 현재의 모습처럼 2개가 아닌 한 바위로 맞붙어 있었다. 굴레바위 옆에 있던 비석등은 배씨의 선산이었고 최고의 명당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명당에 선산을 잡은 배씨문중은 마을에서 번성하며 위세를 떨쳤다.

▲ 평덕마을의 정겨운 주민들.
그러던 중 마을을 찾은 한 도승이 배씨 집안을 찾아 시주를 부탁했지만 계속해서 푸대접을 받자 “굴레바위만 없으면 천하제일의 명당인 데 안타까운 일이다.

이 바위가 없어진다면 좋을 것을”하고 탄식하며 떠났다. 이에 배씨 문중이 굴레바위를 깨뜨리기로 결정하고 석공을 불러 결국 바위를 깨뜨렸다.

이 때 갈라진 바위틈에서 파랑새 한 쌍이 날아올라 700여m 떨어진 연꽃방죽에 빠져죽었다. 이후 번성하던 배씨 문중의 위세가 꺾이고 쇠퇴했다. 이 전설처럼 굴레바위는 두 개의 바위로 갈라진 모습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위필환(70)이장으로부터 마을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위이장은 “인근에서 널리 알려진 봉덕재란 서당이 한국전쟁 이전까지 양지끝 맨 꼭대기에 있었다”며 “멀리 장흥에서 이 서당을 찾아올 정도로 학문적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고 소개했다.

▲ 한때 평덕마을에 번성했던 배씨문중을 상징했던 굴레바위가 문중이 쇠퇴하자 두개로 나뉘었다고 한다.
위이장의 설명처럼 평덕마을은 예로부터 교육열기가 유독 높았다. 사법고시를 합격한 마을 출신이 3명에 이르고 공직이나 교직에 몸담고 있는 출향인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주민 김영순(여·72)씨는 “객지로 나가면 모두 밥은 먹고 산다고 할 만큼 자식들의 교육에 남달랐다”며 “외지에서 성공한 자식들이 많아지면서 한때 100호를 넘던 마을이 예전의 절반에도 못미친다”고 말했다.


▲ 상수도가 갖춰지기 전 주민들이 이용했던 샘이 마을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도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맑은 물이 솟아난다.
미맥농사에만 의존하며 삶을 꾸려온 주민들은 여느 마을보다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농토에서 나오는 소득만으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농한기에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지난 70년대까지 평덕마을은 가마니촌으로 유명했다. 추수가 끝난 농한기에 주민들은 가마니를 짜서 강진읍 5일시장에 내다팔았다.

 장날이면 마을에서 짠 가마니가 700~800장씩 강진읍 정미소로 팔려나갔다. 하루에 가마니 20장씩을 짤 만큼 솜씨 좋은 주민도 있었다.

지난 67년 금릉문화제 손가마니짜기대회에서 마을주민 2명이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가마니를 짜서 큰 이익이 남지 않았지만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집집마다 보탬이 됐다.


대부분의 농촌마을이 그렇듯이 평덕마을도 60대이상 주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힘겨운 농사에 매달려 고단한 삶을 살아가지만 이들의 굵은 손마디와 깊게 패인 주름살마저도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은 비단 기자만의 생각일까.


평덕마을 출신으로는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박종간씨, 의정부지검 부장검사를 맡고 있는 위성운씨, 인천지법 판사로 재직하는 위광하씨, 신전파출소장을 지낸 김동희씨, 울산현대중공업 영업부이사를 역임한 위창일씨, 강진중앙초 교장으로 퇴직한 위창일씨, 강진서초 교장을 지낸 위채환씨, 나주교육청 장학사를 역임한 김성권씨, 대한지적공사 목포지사에서 근무하는 위성효씨, 완도수목원장으로 있는 위안진씨, 대한지적공사 완도지사장을 맡고 있는 위덕환씨, 대한지적공사 강진지사에서 재직하는 위성문씨, 강진군청 친환경농산과에서 근무하는 최영수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 마을주민 김안례씨.
대문이 열린 곳이면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고 반겨주는 인정이 살갑다. 갈수록 세상이 각박해진다고 하지만 찾아오는 이에게 과일 한 쪽, 시원한 음료 한 잔이라도 내놓는 농촌의 인정은 변함이 없었다.


마을 곳곳을 둘러보다 만난 김안례(여·70)씨도 집으로 찾아간 기자를 반갑게 맞아줬다. 김씨는 집 뒤편 텃밭에서 정성껏 키워 깨끗하게 손질한 상추와 직접 담은 고추장을 들고 마을회관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에게 새참으로 대접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제사를 지낸 다음날이면 나물, 떡, 고기 등 제사음식을 마을회관으로 가져와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나눠먹는다”며 “니것내것 없이 나누며 사는 정이 각별하다”고 마을자랑을 했다.

 이어 김씨는 “언제나 대접만 받은 것 같아서 오늘은 새참거리를 준비해서 마을회관으로 가려고 했다”며 “특별한 음식은 아니지만 한 가족처럼 나누며 산다”고 덧붙였다.


45년전 군동면 학평마을에서 시집왔다는 김씨는 “공무원과 선생님이 많이 나온 마을로 인근에서 소문이 자자했다”며 “한 집에 한 명씩은 선생님이 있다고 할 정도로 교육에 쏟는 정성이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또 김씨는 “시집올 당시만 해도 평덕마을이 큰집이고 인근 관덕마을이 작은집이라고 했다”며 “그만큼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평덕마을이 작은집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고 전했다.


마을에 대해 김씨는 “인근에서 반촌으로 알려질 정도로 성품이 좋고 인심이 넘치는 마을”이라며 “서로 상부상조하고 웃어른을 친부모처럼 공경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전통은 여전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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