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작천 상남마을
[마을기행]작천 상남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7.03.09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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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진눈깨비가 온종일 오락가락한다. 다가오는 봄의 길목을 시샘하듯 꽃샘추위가 더욱 매서운 기세지만 잔뜩 웅크린 만물은 어느덧 생기를 머금고 있다. 겨우내 헐벗은 나뭇가지엔 새눈이 움트고 배냇머리처럼 자란 보리는 진한 녹색을 더해간다.


병영면소재지가 마주 보이는 곳에 상남마을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 금강천을 건너면 바로 병영면이지만 행정구역상 작천면에 속한 마을이다.

상남마을은 효동(孝洞)이란 마을명으로 통한다. 길을 물을 땐 발음상 회동이라고 하는 것이 마을을 찾기에 더욱 쉽다.

상남마을은 부모에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효경동(孝敬洞)으로 불리다가 조선 고종대에 이르러 효동이 됐다.

이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재의 상남마을로 개칭됐으며 인근 하남마을과 함께 작천면 이남리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 오봉산(390m)이 가로막고 있어 상남마을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때문에 겨울이면 매서운 북서풍이 불어와 마을에 쌓인 눈이 쉽게 녹지 않는다.

또 마을 뒤편의 물맞는 골창으로 불리는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겨울철 추위가 심한 마을이다. 인근 지역보다 심한 추위를 빗대어 상남마을로 딸을 시집보낼 때는 속옷 한 벌씩을 더 챙겨 보냈다는 속설이 전해 내려온다.


상남마을은 금성박씨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이후 남원양씨, 김해김씨, 한양조씨 등이 옮겨왔다. 현재 30여호 70여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작천면에서 병영면으로 향하는 지방도 814호선에서 갈라진 군도 5호선의 우측에 자리한 상남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한 아랫마을과 북쪽으로 100여m 떨어진 윗동네로 나눠져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아랫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윗마을엔 7~8호가 모여 있다.


마을의 역사를 대변하듯 상남마을에도 정겨운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된장 한 그릇과 바꾼 논인 된장배미, 마을 뒤편의 자두를 닮은 산인 오얏등,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긴 잔등이란 의미를 담은 진잔등, 마을 앞을 흐르는 금강천을 일컫는 청구냇가, 동학농민 전쟁을 피하기 위해 주민들이 피난처로 이용했다고 전해지는 마을 뒤편 골짜기인 스문골, 여자의 가슴을 닮은 모습에서 일컬어진 젓통배기 등 향토색 짙은 지명이 두루 쓰이고 있다.


갑작스런 추위에 마을은 더욱 한적한 모습이었다.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찾을 수 없던 주민들이 20여평 규모의 마을회관에 가득 모여 있었다. 주민 대부분이 미맥농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은 말 그대로 농한기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을회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점심식사도 마을회관에서 함께 한다.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주민 양재선(83)씨는 “거동이 어려운 주민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주민들이 마을회관에서 윷놀이도 즐기며 함께 논다”며 “주민들이 조금씩 내놓은 쌀과 돈으로 매일 점심을 준비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함께 있던 주민 최명근(83)씨는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도와서 처리하는 협동심이 좋은 마을”이라며 “한국전쟁 때에도 작천면에서 유일하게 인명피해가 없었다”고 마을자랑을 더했다.


상남마을은 지난 70년대까지 가구수 50호에 이르는 마을이었다. 주민수도 250명을 넘었다. 그 당시에는 정월 대보름이면 풍물소리가 온종일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아랫마을 사장나무에 모여 농악을 울리며 집집마다 마당밟기를 했다. 마을 아낙들은 윗동네의 사장나무인 소나무 3그루에 그네를 매달고 그네타기를 즐겼다. 또 주민들은 청구냇가를 사이에 두고 병영면 주민들과 밤새도록 불싸움을 하기도 했다.


주민 김정현(72)씨는 “대보름이면 온종일 매구소리에 동네가 시끌시끌했다”며 “예전 사용했던 매구는 보관하고 있지만 대보름이면 떠들썩했던 마을의 모습은 이젠 과거지사가 됐다”고 아쉬워했다.


윗동네엔 마을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했던 샘이 보존돼 있었다. 상남마을에서 이용했던 2개의 샘 가운데 군도 5호선 인근에 있던 아랫마을샘은 도로포장과 함께 사라졌지만 윗동네샘은 아직까지 식수로 이용하는 주민들이 있을 정도다.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마을주민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식수로 사용해 왔다. 현재도 윗동네샘은 식수로 이용할 만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상남마을 주민들이 가장 자랑하는 마을출신은 손용근 판사다. 손판사는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대구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원도서관장 등을 거쳐 현재 춘천지법원장을 맡고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송이순(여·67)씨를 만났다. 강진읍 교촌리에서 생활하다 상남마을로 옮겨온 송씨는 45년간 남편 백웅기(69)씨와 함께 죽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으로 생활해 왔다.


손재주가 좋은 남편 백씨가 대바구니를 엮어내면 송씨는 장에 나가 내다팔았다. 하지만 죽제품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5년 전부터 대바구니를 만들어내는 일도 접었다.


송씨는 “남편도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농사는 짓지 않고 있다”며 “농촌에 살고 있지만 쌀을 사다가 먹는다”고 말했다.

송씨는 텃밭에 고추, 참깨 등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을 뿐 논농사는 짓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강진읍, 병영면의 식당에서 일을 하거나 날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4남4녀의 자녀를 둔 송씨는 “매년 명절이면 아들네 식구들과 딸과 사위들까지 모두 찾아와 온 집안이 시끌시끌하다”며 “이번 설에도 정성껏 키운 씨암탉 2마리를 잡고 홍어 등 음식을 준비해서 함께 명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마을에 대해 송씨는 “텃세가 없고 가족처럼 화목하게 사는 마을”이라며 “요즘처럼 농한기엔 아침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마을회관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고 답했다.

이어 송씨는 “일찍 마을회관으로 나오는 주민이 먼저 청소를 해놓고 헤어질 때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며 “온종일 함께 하지만 다툼 없이 서로 나누며 재미있게 산다”고 마을자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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