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여성교육의 마지막 산증인 양노린 수녀
강진여성교육의 마지막 산증인 양노린 수녀
  • 주희춘
  • 승인 2003.01.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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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때 강진 도착...지금은 78세의 아름다운 할머니
1960년 12월 3일 강진고을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4명의 미국인 수녀가 도착했다. 그중에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 수녀와 메리노린(Mary Noreen․ 당시 34세)수녀가 있었다. 이들은 여성교육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강진에서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려 지금까지 8천700여명의 졸업생을 낸 성요셉여자고등학교(개교당시 성요셉 금릉여자고등학교)를 길러냈다. 토마스아퀴나스 수녀는 30년 동안 교장을 맡아오다 지난 93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메리노린 수녀는 이제 강진여성교육의 마지막 산증인이다. 올해 나이 76세. 한 평생을 강진에서 고스란히 불태웠다. 벽안의 미국인이 한반도 땅끝 조그만 마을에서 평생을 받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 뜻은 종교적 의미에서 찾으면 어렵지 않겠지만, 침체되는 지역현실에 안타까워하는 강진 사람들이 2003년 새해에 배워야할 그 무엇이 있다. 한국명 양순희. 너무 양순하다고 해서 학생들이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이름이 좋아 양노린 수녀란 이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양노린수녀와의 인터뷰는 학교교정에 있는 수녀원 응접실에서 이연희 교장선생님이 배석한 가운데 한시간 30분동안 이뤄졌다.

-40년 전 강진에 오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 우리 네명은 목포로 갔었습니다. 당시 수녀회가 목포에 학교를 세울 계획이었지요. 그래서 미국에서 자원자를 뽑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강진의 금릉중학교가 재정이 어려워 학교를 매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 학교를 짓는 것보다는 기존에 있는 것을 가꾸어 보자고 결정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진으로 온 것 입니다.(이연희 교장선생님은 당시 강진에 온 4명의 수녀가 미국에서 100명의 자원자중에서 선발된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강진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외국인을 만난 강진사람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당시 강진에는 외국인이 딱 한명 있었는데 성당의 신부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당앞에 있던 초라한 기와집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아줌마가 우리일을 거들어 주었고 나중에는 우리가 직접 김치담구는 법을 배웠습니다. 몇 달후 학교교실로 거쳐를 옮겼습니다. 외국여성은 우리가 처음이었지요.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움직이는 곳 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미소).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습니다. 외국사람을 보고 낯설어하거나 적대시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 교육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 불편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양노린 수녀는 아직도 한국말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인터뷰가 진행되는데 교장선생님이 중간에서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주로 음악과 무용,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당시 강진에 여성교육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의 옷차림도 각양각생이었고 나이차이도 많았습니다. 집안에 있던 여자아이들이 학교로 몰려온 것이지요. 학생들이 노래와 무용을 잘 따라했고 피아노 소리 듣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우리는 가르키는게 좋았습니다. 아이들도 배우는 것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당시 수녀들이 모두 자원해서 왔기 때문에 열성이 대단했을 것이라고 했다. 수녀원 응접실에는 당시 목포에서 가져온 피아노가 아직도 한켠에 놓여있었다. )

-성요셉여고의 역할, 그리고 지난 세월 수녀님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올해로 개교 40주년이 됐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부족했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강진의 여성을 교육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외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는데 조그만 역할도 했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강진에 사람이 많아 배우려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인구도 많이 줄었습니다. 성요셉의 설립 정신도 위협받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농촌학교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모두가 도시로 갈려고 합니다. 아마 모든 지역이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결국 국가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농촌을 살리려는 노력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도시로 가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이 문제는 개인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성요셉여고와 수녀님들이 외국인의 이미지를 좋게하는 역할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강진에서도 촛불시위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우리나라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촛불시위를 보고 무슨생각을 하시는지요.
▲굉장히 안타까웠습니다.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텐데....(양노린 수녀의 표정이 찹찹해 졌다) 2주전에 목치료를 위해 서울에 갔었습니다. 시내에서 책을 사고 걸어오는데 촛불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어라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미국인들중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이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양노린 수녀는 정치적인 문제에 많은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옆자리의 교장선생님이 양노린 수녀님이 미국대통령선거에서 부시와 고어가 대결했을 때 고어를 지지했다고 소개했다. 고어가 대통령이 되어야 평화적인 정책을 더 펼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양노린 수녀님은 사회문제에 의견을 내는 것을 삼가했지만 지금도 매일 코리아타임스를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파악하고 있다고 교장선생님이 전했다)

―강진에 이렇게 오래 계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원하시면 다른곳으로 옮길 수 있을 텐데요.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원래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어요. 어디로 옮겨가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졸업생들이 가끔 찾아 오면 더 없이 행복합니다. 미국에 사는 제자들도 많습니다. 독일, 스위스, 케나다에도 있습니다. 미국에 오면 꼭 한번 만나자는 편지도 많이 옵니다. (수녀님은 개교 40주년을 맞아 졸업생들이 보내준 편지를 보여주었다. 제자들에 대해 말할때는 마친 친 자식을 자랑하듯 얼굴이 환해졌다).

-가족들에 대해 대해 질문하면 실례가 되지 않으련지요.(기자는 성직자들에게 가족관계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양노린 수녀와 교장선생님이 당연히 괜찮다며 흔쾌히 대답을 해주었다.)
▲형제가 8명이나 됩니다(웃음). 언니가 네명이고 남동생이 두명, 여동생이 2명입니다. 그중에 큰오빠와 남동생이 신부님입니다. 큰오빠는 파라과이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집안이 카톨릭이지요. 종종 미국 가족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곰방대나 갓, 한복같은 한국 물건을 선물하면 가족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가족들이 이제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제가 강진에 사는게 행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미국의 가족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지요(웃음). 저는 한국이 좋고 강진이 아주 좋습니다. 월드컵때 미국과 한국이 축구시합을 했을 때 저는 한국을 응원했습니다(웃음). (교장선생님은 양노린수녀가 사후에 강진에 뭍히겠다는 의사를 수녀회에 공식적으로 전달했다고 소개했다.

-카톨릭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밑음과 정의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의를 실천하는데 구분을 두지 않고 보편적이지요. 카톨릭은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저는 절에가서 스님들과 대화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카톨릭의 보편성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강진에서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는 어디입니까.
▲강진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산이 있고 강이 있으며 바다가 있습니다. 그중에 백련사와 청자도요지를 좋아합니다. 백련사에서 바다를 보면서 차를 마시면 더 없이 좋습니다. 주지스님도 친절하십니다. 스님과 차마시며 대화하면 재미있습니다. (웃음)

-새해 소망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특별한 것은 없지만 건강했으면 좋겠고 하느님과 가까이서 지내고 싶습니다. 강진주민들도 새해에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기자는 인터뷰를 했던 그날 오후 성요셉여고를 졸업한 한 주민에게 양노린 수녀가 어떤 분이셨냐고 물어보았다. 그 주민은 “모든 재롱을 받아주셨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신 분이었다”고 양노린수녀를 회고했다. 양노린 수녀는 강진사람들의 재롱을 받아주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한평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한 제자가 최근 양노린수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같은 내용들이 절절이 베어있다. “수녀님은 제가 만난 첫 외국인이었고 저희에게 처음으로 영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시골에 살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저희들에게 많은 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꿈들이 이제 온 세상에 펼쳐져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수녀님과 수녀님의 삶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대담=주희춘․ 사진=임영관 기자>



■양노린 수녀 약력
▲1927년:미국 펜실바니아주 피츠버그시 출생
▲1945년(18세):사랑의 시튼수녀회 입회
▲1944~1960:미국에서 교사로 근무
▲1954~1957년:펜실바니아주 씨튼힐대학교 졸업
▲1961년:대한민군 강진으로 이주
▲1962~1992:성요셉여고 평교사 근무
▲1992: 평교사로 은퇴
▲1992~현재:사랑의 씨튼수녀회 고문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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