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행]칠량 송산마을
[마을기행]칠량 송산마을
  • 조기영 기자
  • 승인 2007.02.02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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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군의 변덕이 얄궂다. 입춘이 얼마 남지 않아선지 봄날처럼 따뜻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다가 갑자기 몰아치는 한파는 다시금 옷깃을 바짝 여미게 한다.


강진읍에서 국도 23호선을 타고 군동면을 지나 칠량면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송산마을이다. 국도 바로 옆에 위치한 송산마을은 80여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비교적 규모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넓은 간척지 논이 펼쳐져 있고 강진만 너머 강진읍의 전경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송산마을이 터를 잡은 곳은 일명 고견치(顧見峙)로 불린다. 돌아보는 고개라는 뜻으로 도라배기재라고 하는 곳이다. 같은 법정리에 속하는 구로마을에서 송산마을 사이의 이 고개는 예전 칠량면 뿐만 아니라 대구면 주민들이 강진읍을 오갔던 길목이었다.

장날 강진읍 본토박이들의 텃세에 시달린 이들이 이 고개에 다다르면 강진읍 쪽을 돌아보면서 분풀이를 했다고 하여 도라배기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다른 유래도 전해진다. 예전 관아에게 엄한 취조를 받은 후 무죄로 밝혀진 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 고개에서 강진읍을 보며 화풀이를 한 데서 도라배기재라고 했다.


탐진최씨가 마을을 이룬 후 10여가구에 불과했던 송산마을은 지난 30년대 중반 완료된 간척사업으로 200여㏊의 농경지가 새로 조성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농경지를 따라 마을로 이주해온 주민들이 증가하면서 한때 100여가구에 이르는 마을을 이뤘다.

현재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한 새마을에 70여가구가 모여 있고 국도 23호선을 너머 웃돔과 은적골에 10여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간척지 인근의 돌간이란 곳에도 16가구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지난 81년 태풍 ‘애그니스’ 때문에 수해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대부분 새마을로 옮겨가면서 예전 집터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웃돔은 탐진최씨가 처음 정착했던 곳으로 원동네라고 불리며 은적골은 예전 금광이 있었던 골짜기(금골)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금은이 쌓여있던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돌간은 간척지를 막을 때 돌을 채취하던 장소여서 부른 지명이다.


송산마을은 관내에서 가장 많은 한우를 사육하는 마을로 유명하다. 1천두 남짓의 한우를 키우고 있다. 많게는 수백두에서부터 적게는 한두마리까지 소를 키우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다. 마을 곳곳을 둘러봐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 마리수가 주민수의 몇 곱절에 이른다.


주민들이 한우 사육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주민 김복술(68)씨의 영향이 컸다. 마을에서 가장 많은 300여두의 한우를 키우는 김씨는 20여년 전부터 주민들에게 한우 사육을 권유했던 것. 김씨의 권유로 한집 두집 한우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한우단지’같은 마을을 이루게 됐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 최낙선(77)씨는 “새로 조성된 간척지에서 소작을 얻기 위해 마을로 옮겨온 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예전에는 빈촌이었다”며 “소를 사육하는 농가가 많아지면서 송산마을은 소 키워서 부자된 마을이란 말도 듣는다”고 말했다. 함께 있던 최상채(77)씨는 “소분뇨는 퇴비로 사용하기 때문에 미맥농사에도 도움이 된다”며 “마을에서 수확한 보리는 공판에서 모두 최고등급을 받을 정도로 관내에서 송산마을만큼 보리가 잘 되는 곳도 없다”고 덧붙였다.


마을의 최고령 최귀섭(89)옹은 “마을주변에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송산이라고 불리게 됐다”며 “웃돔에 사장나무였던 아름드리 소나무 2그루가 있었지만 이유도 없이 죽어버려 너무도 아쉽다”고 마을의 유래를 설명했다. 


강진읍 5일장을 오가는 길목이었던 송산마을에는 장꾼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운영되기도 했다. 각종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던 만물상과 주막 3곳이 마을에서 영업했다. 또 다른 마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이발관이 현재까지 개업하고 있다. 주민 서영훈(65)씨가 2대째 마을이발관을 지키고 있다. 해방 직후인 46년 문을 연 마을이발관은 송산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 단골손님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경로효친을 지켜가는 전통이 송산마을의 자랑이다. 마을 청년회와 부녀회가 매년 어버이날 뜻 깊은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음식을 대접하는 경로잔치를 격년제로 열고 있으며 경로잔치를 열지 않는 해에는 주민들이 함께 야외나들이에 나선다. 송산마을 청년회와 부녀회는 올해 어버이날을 맞아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야외 나들이에 나설 계획이다. 


송산마을 출신으로는 안양에서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최길삼씨, 고흥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최재철씨, 해남세무서에 근무하는 변재만씨, 인천에서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는 최재서씨 등이 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


한때 16가구가 생활했던 돌간에서 30여년 만에 다시 터전을 일꾼 김영석(63)씨. 김씨는 6년전 서울생활을 접고 부인과 함께 송산마을로 돌아왔다. 현재 김씨가 다시 삶의 터전을 잡은 곳은 젊은 시절에 살았던 오두막집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예전의 집터만 남아있을 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은 모두 철거되고 단 한 채도 남아있지 않았다. 송산마을에서 강진만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돌간은 지난 81년 태풍에 큰 수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마을회관 인근의 새마을로 옮겨갔다.


김씨는 “벼농사에만 의지했던 시절에 모두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정이 넘쳐났다”며 “그런 고향의 대한 그리움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였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강산이 몇 번은 바뀔 세월이 흘러서인지 마을의 모습도 참 많이 변했다”며 “기억 속에 남아있던 예전 집들은 남아있지 않지만 주민들의 인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미처 논을 장만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던 김씨는 텃밭을 일궈 고추, 감자 등 밭작물을 키우고 있다. 그나마 텃밭에서 100만원 남짓의 소득을 올린다. 매월 받는 10여만원의 국민연금도 김씨에게 큰 소득이다.


김씨는 “수중에 가진 돈이 없으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쉽지 않다”며 “귀농하는 주민들도 정착할 수 있도록 보조나 지원이 뒤따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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